“양심이란 겁쟁이들이 강자를 겁주기 위해 만든 겁니다.”
지난 7일 개봉한 터키 영화 ‘윈터슬립’ 속에 나온 대사다. 이 영화는 위선과 기만으로 똘똘 뭉친 돈 많은 엘리트 주인공 아이딘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집세 독촉을 받는 세입자의 어린 아들이 집 주인인 아이딘의 차에 돌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196분 내내 아이딘을 통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기울어진 균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영화는 주인공의 아내를 통해 불균형을 수평 형태로 만들어줄 도구로 기부와 자선을 내세웠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자선사업을 펼치는 어린 아내의 모습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 역시 자선의 본질을 떠나 돈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약자를 내려다 봤다. 앞서 대사는 영화 말미 아내와 함께 자선사업을 하는 교사가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해 아이딘에게 한 말이다. 양심에 눈치를 보며 행하는 강자의 자선사업은 그 본질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심이 더 이상 강자를 겁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 곳은 없을까. 여기서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본다. “엄청난 두뇌를 가진 외계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이 지구를 방문했다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무엇을 가장 믿지 못할까?”
미국 스포츠 채널 ESPN의 제작자 존 브렌커스가 자신의 책 ‘퍼펙션 포인트’에서 던진 질문이다. 정답은 ‘메이저리그 타자가 메이저리그 투수의 공을 때리는 것’이다. 브렌커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그럴 듯한 이유를 덧붙였다. 풀어쓰자면 메이저리그 투수가 던진 160㎞짜리 강속구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데 걸리는 0.4(400밀리초)초가 되기도 전에 타자의 눈앞에 도달한다. 공을 때리는 타자도, 공을 던지는 투수도 매우 대단함을 설명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대단한 선수들 사이에서 더 대단한 선수가 있다. 바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다. 세 차례나 미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을 받은 데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연봉을 받았다. 좋은 성적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스포츠 세상에서 커쇼의 올 시즌 성적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7경기에 선발 등판해 1승2패 평균자책점 4.26에 그쳤다. 그럼에도 언론과 여론은 커쇼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다.
평소 보여준 인품 덕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메이저리그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2011년부터 아내 엘리스와 함께 자선활동에 나섰다. 첫 번째 사업은 신혼여행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던 잠비아에 삼진 1개당 적립금을 모아 고아원을 세웠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 단체를 만들었고 LA 지역 자선 활동에도 참가하고 있다.
지난 4월 네팔 지진을 통해 한국의 스포츠 선수들에게서도 커쇼의 모습을 봤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누구보다 활발히 기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네팔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10만 달러를 내놨다. 산악인 엄홍길도 대한적십자 긴급구호대장을 맡아 가장 먼저 네팔 지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경주도 10만 달러를 복구 비용으로 내놨다. 네팔이 아니더라도 장미란, 박찬호, 양준혁 등도 은퇴 후 사회공헌 차원에서 재단을 설립해 기부 행사를 하고 있다. ‘윈터슬립’ 속 주인공과 그의 아내처럼 세상은 돈 있는 사람이 강자다. 스포츠 스타들도 부와 명예를 얻으며 강자가 됐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양심에 겁먹지 않는 강자’ 말이다.
서윤경 문화체육부 차장 y27k@kmib.co.kr
[세상만사-서윤경] 스포츠 선수가 아름다울 때
입력 2015-05-22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