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과 비행기] 수㎞ 이동때도 붕∼ 전용기와 사랑에 빠진 젊은 지도자

입력 2015-05-23 02:33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해 말 북한이 새로 도입한 여객기 AN-148의 조종석에 앉아 시험 운항을 하고 있다(위 사진). 김 제1비서가 지난 2월 자신의 전용기 IL-62 내 집무실에서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건설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가운데). 아래는 김 제1비서가 북한이 자체 제작한 경비행기를 타고 시험 이륙하는 모습. 조선중앙TV·노동신문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5월 9일 오전 9시 북한 황해남도 온천비행장. ‘서부지구 작전비행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활주로에 날렵한 순백색 여객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출입구가 열리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그의 부인 이설주가 붉은 카펫이 깔린 트랩을 걸어 내려왔다. 일부 외신들이 미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과 김 제1비서의 이름을 합쳐 ‘에어포스 은’이라고 조롱한 바 있는 그의 전용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기행(奇行)’에 가까운 김 제1비서의 전용기 사랑=이튿날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환영곡이 울리는 가운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도착하자 폭풍 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 올라 천지를 진감했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김 제1비서는 북한 공군 조종사들의 기량 겨루기 행사인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성원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 참석차 이곳을 찾았다고 신문은 전했다.

노동신문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접한 국제사회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전용기가 이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이곳 온천비행장까지의 거리는 40여㎞. 차량을 이용해도 1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굳이 비행기로 이동한 것이다. 관측통들은 젊은 김 제1비서가 자기과시를 위해 전용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랜 기간 해외 생활을 해온 터라 외국 정상들이 순방에 나설 때 으레 행하는 화려한 환영행사를 모방하려는 욕구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 제1비서의 이런 ‘엉뚱한’ 전용기 사랑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 2월 15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들은 김 제1비서가 평양의 ‘미래과학자거리’ 건설현장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대동강변을 따라 고층 아파트와 원형 형태의 건물들이 늘어선 호화 주택가로, 김책공대 교직원들을 위해 김 제1비서 지시로 건설 중이다.

그런데 이날 김 제1비서는 지상 시찰이 마뜩찮은 듯 전용기를 타고 건설현장을 찾았다. 이번에도 평양 순안공항에서 이륙했다고 치면 고작 수㎞를 이동한 셈이다.

김 제1비서는 전용기의 작은 창을 통해 현장을 내려다보며 “당에서 비준한 거리형성안의 요구대로 건축물들을 들여앉히니 정말 보기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대한 전용기가 저공에서 굉음을 내며 선회 비행하는 모습을 본 평양 시민들은 아마 크게 놀랐을 듯하다.

◇김 제1비서의 전용기는 구소련제 노후 여객기=그가 이토록 애용하는 전용기는 IL-62 기종이다. 구소련 시절 일류신 항공 설계국이 제작한 180석 규모의 중형 장거리 여객기다. 1967년 러시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가 모스크바∼몬트리올 항로에 처음 투입한 이후 사회주의권 국가를 중심으로 운용됐으며, 2004년 수단 정부에 납품된 것을 끝으로 생산이 중단됐다.

김 제1비서의 전용기가 언제 생산된 기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후 기체임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전 세계에서 운용 중인 IL-62의 평균 기령은 30년을 넘으며, 북한 또한 5대를 80년대에 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북한 유일의 항공사인 고려항공이 운용 중인 IL-62는 모두 안전 문제를 이유로 유럽연합(EU) 항공 당국에 의해 지난해 11월 기준 유럽 취항이 금지된 상태다. 지난해 11월에는 김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이 기종을 타고 모스크바에 가던 중 기체 고장으로 회항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매번 열차만 이용한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전용기 사랑을 숨기지 않는 김 제1비서도 안전만큼은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북한은 2010년 우크라이나 항공기 제작사인 안토노프의 신형 여객기 AN-148을 두 대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체는 지난해와 올해 각각 북한에 인도된 것으로 전해졌다.

AN-148은 90석 규모의 중·단거리 여객기로, 2009년 운항을 시작한 기종이다. 올해 초 이 항공기를 도입하면서 김 제1비서가 직접 조종석에 앉아 조종간을 잡은 모습이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지난해 8월에도 김 제1비서가 고려항공 도색이 된 AN-148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김 제1비서는 AN-148보다 IL-62를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AN-148은 기체 특성상 기체 하부가 지면에 거의 맞닿아 있어 트랩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높은 트랩 위에 서서 손을 흔들며 내려오는 등 과시적 제스처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AN-148은 비공식 행사에만 쓰일 가능성이 크다. 외관 또한 AN-148은 군 수송기를 방불케 할 만큼 둔중하지만 IL-62는 가늘고 날렵해 그의 취향에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김 제1비서의 비행기 사랑은 ‘전방위적’=비행기에 대한 그의 애착은 전용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김 제1비서는 지난해부터 공군 부대를 유독 많이 찾고 있다. 총 18회로, 연료와 훈련이 부족해 사실상 전투력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 북한 공군의 실태에 비하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이 같은 행보가 열세인 공군 전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관측도 있다.

항공기 자체 생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노동신문은 지난달 1일 김 제1비서가 ‘전동렬 동무가 사업하는 기계공장’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하며, 이 공장에서 제작한 경비행기 사진을 공개했다. 지난달 16일에는 김 제1비서가 경비행기 개발에 참여한 인력들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로 초청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아직 경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내연기관 등 관련 기술이 없는 탓에 외국에서 수입하거나 기존에 보유하던 기체를 재조립한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비행기 개발에 대한 김 제1비서의 의지만큼은 확고해 보인다.

비행기 조종 실력 또한 상당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김 제1비서는 북한이 자체 개발했다는 경비행기 조종석에 올라타 직접 이착륙 시험비행을 한 뒤 “성능이 대단히 높다. 조종하기 편리하고 발동기 소리도 아주 좋다. 잘 만들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외에도 김 제1비서는 종종 미국산 경비행기인 세스나 172를 직접 몰고 현지지도에 나서는가 하면, 강원도 원산 해안가에 위치한 그의 별장 인근에 경비행기 전용 활주로가 위성을 통해 포착되기도 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