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한국 교회가 그렇다. 어느 날 퍼뜩 정신이 들어 선대의 신앙과 교회의 역사를 물으려니 답해줄 사람들이 다 천국 가고 없는 것이다. 설립 100년 전후의 개교회 역시 대개가 그러했다.
하지만 출석 교인 40여명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교회(류덕중 목사)만은 달랐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고 했다. 그들은 교회라는 마음판에 '산방산 돌을 캐어' 말씀을 새겨 후대에 전했다.
산방산은 대정교회에서 4㎞ 남짓 떨어진 종상화산(鐘狀火山)이다. 대정교회 교인들은 1957년 4월 24일 산방산 돌을 캤다. 스데반과 같은 제주 첫 순교자 이도종(1891∼1948) 목사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교우들이 구루마(수레의 일어)를 끌고 직접 구멍이 없는 산방산 돌을 캐어 운반하고, 그 돌에 글을 새겨 교회 마당에 순교자 이도종 목사 기념비를 건립하여 예배를 드리다'라고 당회록에 적었다. 제주의 돌은 화산섬의 특성상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었다. 제주도내에서 유일하게 산방산 지질만이 단단한 안산암을 품고 있었다. 산방산 돌을 캔 이유다.
이도종 목사는 제주 첫 목사이자 첫 순교자다.
순교일이 1948년 6월 16일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좌우 이념이 극명하게 갈려 대혼란을 빚었다. 제주도는 ‘4·3사건’으로 기록되는 소요사태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때가 48년이었다. 이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 정치적 문제와 식량난이 겹치면서 폭동으로 비화됐다. 미군정은 무력으로 이를 제압했다.
그즈음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는 중산간지역 회중의 순회 목회를 위해 고산교회(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를 출발, 산길 25리(10㎞)를 걸어오던 중이었다. 고산교회는 그가 1937∼40년 시무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실종됐다. 대정읍 인향동 골짜기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10여명과 함께 생매장 당했다. “양놈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 스파이”라는 혐의였다. 이 목사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 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며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이 증언은 그 현장을 목격한 무장대 일원이 훗날 고백한 내용이다.
그리고 9년 후 대정교회 교우들은 수레에 돌을 싣고 와 ‘손가락에 매고 마음판’에 새겼다.
제주 첫 목사, 첫 순교자의 교회
지난 18일, 대정교회 정원 한쪽 ‘순교자 이도종 목사 기념비’는 거친 빗줄기를 받고 있었다. 그 순교비 뒤로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유배지 초가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2003년 예장 통합 측 제주노회가 기념성역을 조성하면서 순교비 주변은 소공원을 이뤘다. 후박나무와 벚나무 등으로 숲이 울창하다. 그 나무 그늘 아래는 40년 된 종과 2m 높이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다. 추사 유배지 조경과 대정교회 정원이 한데 묶인 대정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정원을 갖춘 곳이 아닐까 싶다.
1973년 입당한 예배당 역시 디자인적인 색채로 70, 80년대 교회 건축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연한 황금색조 벽에 붉은 지붕, 고딕창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연초록 잔디와 조화를 이룬다. 관광객들이 지나다 말고 탄성과 함께 인증샷 찍기에 바쁘다. 성전 내부는 바실리카식 회당이다. 권위를 상징하는 종탑은 소박하다. 예전 종탑 위에는 철제 구조물과 그 구조물에 스피커, 십자가 등이 있었다. 하지만 태풍이 불면 위험하기 때문에 철거됐다. 십자가는 예배당 건물 후미에 별도로 세웠다.
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934년 이곳 교인들은 인성리 이태진 가옥을 기도처로 삼아 예배를 드렸다. 옛 대정현 관아와 성곽이 있던 성안 기도처였다. 그들은 당시 신시가지라고 할 수 있는 10리 밖 모슬포교회를 마다 않고 다녔다. 1909년 설립된 모슬포교회는 제주 산남지역의 모교회였다. 모슬포는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일제의 병참기지화 영향으로 번성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 옆의 역사교회
모슬포교회는 1937년 당회를 통해 대정읍성 안 인성리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대정읍교회’ 분교를 결정하고 제8회 제주노회를 통해 최종 허락을 받는다. 지금의 대정교회의 출발이다. 당회장은 모슬포교회 이근호 목사가 겸하였다.
대정읍교회는 분교 8개월 만에 장년 30여명, 유년주일학교 80여명이 모인다. 연보(헌금)는 100여원이 모였다. 이 연보로 종각을 건축하고 종을 달았다. 이 목사는 제9회 제주노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주일 날 대 례배 시간을 오후 2시로 작정하고 제가 오전에는 모실포, 오후에는 대정읍 설교를 하여 오는 바 도보에 곤란이 없지 않더니 해 교회로서 자전거 1대를 금춘에 사서줌으로 두 교회를 돌아보는 것이 무여한 교회나 다름없사오며….’
그렇게 자립한 대정읍교회는 읍사무소 이전 등으로 읍세가 약화되자 인성교회로 명칭을 바꾼다. 하지만 곧 일제의 교회 폐쇄 압력 등으로 공백기를 겪기도 한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고 피란민이 몰렸다. 교회는 피란민 등과 함께 79㎡(24평) 넓이의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에서 전쟁의 환난을 극복한다.
“그 인성교회 예배당이 성도가 늘면서 좁았어요. 지금 교회 자리로 신축 이전을 결정했죠. 한데 교회 건축 중 태풍으로 예배당 벽이 무너져버렸어요. 남편은 이렇게 교우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 없다며 뭍으로 나갔어요. 고생 끝에 돌아온 남편은 70만원이란 건축헌금을 들고 왔어요. 그런 은혜가 없었지요.”
진창림(82) 원로권사의 얘기다. 진 권사는 이날 본당에서 부임 6개월 된 류 목사에게 옛 얘기를 들려줬다. 제주교회사에 깊은 지식을 갖춘 류 목사는 구술을 녹음하고 기록했다.
진 권사의 남편은 이 교회 3대 장로인 류석순(작고)이다. 교회 건축 당시 집사였던 그는 한 달여를 서울과 전국 각지를 돌며 태풍에 무너진 예배당 사정을 호소했다. 그 호소를 들어준 사람들은 대정교회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이들이었다. 그중 사업가 김윤환(제주 에덴수양관 설립자)은 30만원을 헌금했다. 그렇게 교회는 이어졌다. 이듬해 인성교회에서 대정교회로 이름을 바꾼 교회는 안덕면에 덕수교회를 분립시켰다.
한국 최고의 교회 정원으로 꼽을 만
진 권사는 고산리가 고향으로 고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처녀 적 이유 없이 몸이 아팠다. 굿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오빠도 죽고 자신도 죽을 것 같았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해서 믿었다.”
그는 열다섯 살 무렵 제주시 동부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다.
“몸에 진동이 막 오더라고요. ‘아이구 어망(엄마의 제주 사투리)’ ‘아이구 어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어요.”
이 경험은 훗날 믿음의 족보가 된다. 진 권사의 아버지는 딸을 믿지 않는 집안에 강제 결혼시키려 했다. 이를 거부한 진 권사는 류석순을 만나 결혼한다. ‘믿는 사람’이라는 게 단 하나의 이유였다. 부부는 지금은 제주추사관 주차장 자리가 된 터에 살며 교회를 섬겼다. 교회 앞 대정우물터는 진 권사가 교회 잔치 때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두레박을 내리던 곳이다.
그의 시아버지 류화평은 권서인으로 활동하다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제주 위미교회를 개척했다. 화순교회(현 안덕교회)에서도 목회를 했다. 부부의 큰아들 승남(62)씨는 제주 신촌교회 목사다. 2남 승호(55)씨는 아버지에 이어 대정교회 장로이고 3남 승삼(51)씨는 집사다. 4남 승선(49)씨는 제주 남원 의귀교회를 섬긴다.
‘지혜로운 여인’ 진 권사는 기억력이 좋았다. 이도종 목사가 전북 김제중앙교회 담임목사 시절 반일 시국 강연을 했다가 교회를 사임하고 제주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 등을 ‘활동사진’ 보여주듯 했다. 이 목사는 일제에 성직을 박탈당해 떠돌기도 했다. 진 권사는 이 목사의 어머니와 사모 등이 고산교회를 이끌어가던 이야기도 했다. 또 6·25 전후 남로당이 주민을 모아놓고 “공평한 세상”을 외치며 입산을 권유한 얘기를 사진 찍어 놓은 듯 보여줬다.
대정교회는 진 권사와 같은 원로들의 구술과 자료 등을 확보해 교회 역사를 제대로 정리할 줄 안다. 모교회인 모슬포교회 역시 마음판을 새기는데 강하다. 이 두 교회의 영향으로 제주 서부는 ‘제주순례길’이 형성됐다. 대정교회, 모슬포교회, 고산교회, 용수교회, 조수교회, 강병대교회, 이도종 목사 순교터, 조남수 목사 공덕비 등은 그 길에 돌로 새긴 마음판이다.
그들은 또 성지를 관리할 줄 안다. 대정교회 김형문(63·금산건강원 대표) 장로와 같은 이들은 잔디와 정원 관리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처럼’ 가꾼다. “뛰노는 교회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일이 아닌 한 농약을 안 친다”는 김 장로는 집보다 교회가 먼저다. 템플스테이와 같은 처치스테이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교회가 대정읍성 대정교회다.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교회' 비전 품은 류덕중 목사
제주 선교 역사와 제주 선교 방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예장 통합에서 학원선교 전담 목회를 해왔다. 수년 전부터 제주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1995년 무렵 ‘한라에서 백두까지 나라와 민족을 품고’를 진행하기도 했다.
대정교회 부임 후 2명에 불과하던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십수명으로 늘렸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세대를 잇는 가교가 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주일학교 등이 활성화되면서 3대가 출석하는 교인이 늘었다. 또 제주시와 같은 도시에 살면서 주일이면 부모가 있는 대정교회로 와 주일성수하는 이들도 늘었다. “아이들이 교회에 가고 싶어 하면 성공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거든요.”
제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