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김흥규] 어부의 영성

입력 2015-05-22 00:40

요즈음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야성을 잃었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야성이라는 것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겠으나 전도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자. 한때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닥치는 대로 전도한 적이 있다. 노방전도, 축호전도, 문서전도, 방송전도 등등 무수한 방법을 총동원해 전도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와 같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도방법은 이제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사람들이 거부감이나 피로감을 느끼는 탓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전도의 야성을 잃어버린데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최초로 제자 넷을 부르셨을 때 그들 모두는 어부였다. 그중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수제자들이 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이들은 모두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복음전파에 명운을 걸었다. 그 유명한 순례성지 산티아고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당시 세계관으로 땅끝으로 여겼던 스페인으로 가서 포교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12사도가 모두 용감했겠지만 유독 어부 출신 네 제자들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왜 어부 출신들이 주류가 되었을까. 예컨대 구약시대에는 목자 출신인 모세와 다윗 등이 특출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목자가 없다. 왜 목자가 아닌 어부들이 초대교회의 주도세력이 되었을까. 목자에게는 언제나 맡겨진 양들의 수가 고정돼 있다. 주어진 양들만 최선을 다해 잘 돌보는 것으로 목자의 임무는 완수된다.

반면에 어부에게는 포획할 물고기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야말로 배를 타고 진출할 수 있는 오대양 전체가 고기잡이의 터전이다. 물밑에 무진장 깔려 있는 온갖 다양한 어족들을 마음껏 잡아 올릴 수 있다. 전직(前職)은 못 속인다고, 망망대해를 휘젓고 다니는 어부 특유의 야성이 발길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다. 이 말씀이 나온 역사적 정황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은 낚시질이 아닌 그물을 통한 고기잡이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낚시와 그물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낚시는 바늘에 미끼를 달아 한 마리 두 마리 낚아 올리는 것이지만 그물은 한꺼번에 물고기를 왕창 잡아 올리는 방법이다. 그러기에 그물로 하는 고기잡이에서는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안 물고의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이, 단지 그물의 권세에 압도를 당해 딸려 올라갈 뿐이다.

사람 낚는 일도 전도자가 이런저런 유인책이라는 미끼를 내밀 때 피전도자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미끼를 물거나 내뱉거나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이라는 그물의 권세에 전적으로 코가 꿰여 꼼짝없이 끌려들어갈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처럼 그물에 사로잡혀 딸려갈 때 삶의 가치가 재정돈된다.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이 뒤로 밀려나고 가장 하찮게 여기던 것이 꼭대기에 서는 가치의 대역전이 일어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물 밖으로 나가면 죽듯이, 예수님의 그물에 딸려 올라간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산다.

한때 권세 있는 복음의 그물에 걸려 전도폭발의 일망타진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때 그 어부의 영성은 어디로 갔을까. 망망대양으로 나아가 거침없이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야성을 잃고 주어진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만족하는 왜소한 시대가 아닌가!

김흥규 목사(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