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반, 경운궁에 큰불이 나 함녕전을 비롯해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경효전 등 여러 전각이 모두 타버렸다. 1904년 5월 일본군이 서울에 가득 들어왔을 때였다. 대궐 화재가 많았지만 이처럼 혹심한 적은 없었다. 일본의 방화 혐의가 짙었다. 이제 경운궁도 고종이 안주할 공간이 되지 못했다.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 사이에 있는 황실도서관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뒤에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수옥헌은 중명전(重明殿)으로 개명한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한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인 중명전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고종과 대신들이 1905년 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을사조약을 강요당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여기서 보낸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중명전을 사교클럽으로 격하시키려고 했지만 고종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결국 1915년 정동구락부(클럽)로 변신해 외국인이 드나드는 놀이터가 되었다.
문화재청은 2006년 중명전을 매입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1층에 전시실을 만들었다. 중구청은 29일과 30일 ‘정동 야행’ 행사를 갖는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중명전을 포함해 여러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문화탐방은 예약 첫날 200명 인원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때 중명전 1층 테라스에서 전통음악을 공연한다.
최성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톡톡! 한국의 문화유산] 을사늑약 110년전 현장, 중명전
입력 2015-05-22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