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8천년 전 제주의 속살, 고산리 수월봉 지질트레일

입력 2015-05-21 02:59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수월봉을 찾은 탐방객이 '화산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지층을 살펴보고 있다.
수월봉은 1만8000년 전 화산 폭발 당시 화산재 등이 켜켜이 쌓인 경이로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슬픈 전설의 주인공 녹고의 얼굴 모습.
차귀도의 해넘이 풍경.
수월봉 앞바다를 유영하는 남방돌고래.
제주의 서쪽 끝에 가면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풍광이 있다. 서귀포시와 경계를 이루는 제주시의 끝자락 한경면 고산리가 그곳이다.

‘우르르 쾅 쾅!’

1만8000년 전 제주 전역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폭발음이 고산리 앞바다에서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땅속에서 올라온 마그마가 지하수 또는 바닷물과 만나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폭발한 것이다. 폭발과 함께 터져 나온 화산재들은 화산가스, 수증기와 뒤엉켜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지표면 위를 훑고 지나며 쌓이고 쌓여 커다란 봉우리를 이뤘다.

오랜 세월 강한 바람과 파도에 깎이면서 화산체 대부분이 사라지고, 1.5㎞에 이르는 해안절벽만이 병풍을 두르듯 남아 지금의 수월봉을 이루고 있다.

수월봉 화산재층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층리의 연속적인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때문에 ‘화산학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중요한 지질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2010년 10월에는 한라산, 성산일출봉, 만장굴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았다. 현재 세계 34개국 111곳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고 국내에는 제주도가 유일하다.

제주도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은 이듬해인 2011년부터 수월봉 일대에서 제주도 세계지질공원 국제트레일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제주의 독특한 지질특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질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트레일이란 기존의 수직적인 등산로 개념에서 벗어나 편하게 산림 속 주변을 걸어가는 친환경적 탐방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수월봉 일원은 올레12길 중 한 부분이다. 도보여행 중 잠시 쉬어가는 언덕배기 중 하나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은 엉알길 코스(해경 파출소∼용암과 주상절리∼갱도진지∼엉알과 화산재 지층∼수월봉 정상∼검은모래해변∼해녀의 집), 당산봉 코스(거북바위∼생이기정∼당산봉 가마우지∼당산봉수), 차귀도 코스(자구내 포구∼차귀도 등대∼장군바위) 등 다양한 코스로 구성돼 탐방객들이 특이하게 형성된 제주도 지질의 진면목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4.6㎞에 이르는 수월봉 엉알길 코스 가운데 위치한 수월봉 정상 절벽 밑 ‘엉알’이라 불리는 곳은 화산재 지층이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엉알길은 벼랑·절벽 등을 뜻하는 제주어 ‘엉’과 아래쪽을 이르는 ‘알’이 합쳐진 말로 ‘벼랑 아래 있는 길’을 의미한다. 이곳은 수월봉 화산 분출 당시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분출물이 쌓인 화산재 지층이 약 70m 두께로 종잇장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층층이 쌓인 수십·수백 겹의 지층은 두툼한 화산학 교과서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돼 보는 이들을 경탄하게 한다. 각 층의 두께가 얼마나 고른지 사람들이 일부러 빚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언덕 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차귀도를 건너다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아래쪽 절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걷게 되면 해안선의 모양이 너무나 신비로워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탄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다 속으로 잠기던 해가 사력을 다해 빛을 쏘아대면, 거무튀튀하던 절벽의 겉면에 오렌지빛 장벽이 한꺼풀 덧씌워진다.

엉알길 코스를 지나다 보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일본군 진지도 볼 수 있다. 수월봉 갱도 진지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고산지역으로 진입해 들어올 경우에 대비해 갱도에서 바다로 직접 발진, 전함을 공격하는 자살특공용 보트와 탄약이 보관돼 있었다.

수월봉 입구 쪽에만 보지 말고 반대편 ‘해녀의 집’ 쪽도 반드시 가보자. 이곳은 화산 폭발지점에서 좀 더 먼 곳이어서 지층이 굵은 돌 대신 화산재로만 주로 이뤄져 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가보면 놀랄만한 경치가 숨겨져 있다. 운이 좋으면 남방돌고래들이 떼지어 유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수월봉에는 또 너무나 애틋하고 슬픈 남매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병을 앓던 어머니를 보살피던 수월이와 녹고 남매가 있었다. 이들 남매에게 지나가던 승려가 100가지 약초를 구해 어머니를 구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남매는 백방으로 약초를 캐러다닌 끝에 99가지 약초를 구했으나 마지막 한 가지 오갈피를 구하지 못했다. 수월이는 수월봉 낭떠러지 절벽 아래 있는 오갈피를 발견하고 홀어머니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을 내려가다 떨어져 죽었다. 동생 녹고도 누이를 잃은 슬픔에 17일 동안 눈물을 흘리다 죽고 만다. 녹고의 눈물이 절벽 곳곳에서 솟아나 샘물이 됐다고 한다.

마치 절벽이 매일 눈물을 흘리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녹고와 수월의 전설을 진짜처럼 믿었고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 이 언덕을 ‘녹고물 오름’이라 불렀다. 그러나 실제 녹고의 눈물은 해안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흘러내려가던 빗물이 진흙으로 구성된 불투수성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층 옆으로 새어나오는 것이다.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앞바다 차귀도의 해넘이 풍경은 안면도 꽃지해변과 강화도 화도면 장화리 등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일몰로 꼽힌다. 섬 반대편의 성산일출만큼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온 종일 제주를 비추던 태양이 섬 한 바퀴를 돌아 수월봉 서쪽 수평선과 부딪치며 붉게 타오르면 뜨거운 기운의 마그마가 차디찬 바다와 만나 폭발하듯 태양을 삼킨 바다는 불덩이를 토해내며 하늘을 온통 빨갛게 채색한다. 석양의 붉은 빛은 긴 세월 주름살처럼 패인 해안절벽을 비추며 1만8000년 전 뜨겁고 격렬했던 화산활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의 또다른 코스인 당산봉은 수월봉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물과 뜨거운 마그마의 폭발적 반응에 의해 형성됐다. 3.2㎞에 이르는 이 코스에는 거북바위와 당산봉 가마우지, 당산봉수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자구내 포구에서 2㎞ 떨어진 차귀도는 깎아지른 해안절벽과 장군바위 등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무인도다. 섬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는 차귀도 일대는 1년 내내 배낚시 체험도 가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주=글·사진 남호철 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