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이번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년에 또 도전하겠다”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산후 몸조리를 위해 친정으로 간 아내가 얼마 후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포항 집으로 내려왔다. 딸이 없던 집에서 자란 나는 은혜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포항에서 3년이 채 안 되는 직장생활을 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사표를 내려고 회사 인력관리실에 갔더니 곧 홍콩지점이 생기니 홍콩으로 보내주겠다면서 사표를 내지 말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직장에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 집에 왔다.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해서 좋았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생활해야 했던 아내는 가정을 꾸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뚝뚝한 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퇴직금이 떨어질 무렵 아내는 다시 간호사 생활을 했다. 그때 우리는 서울침례교회 교육목사로 계시던 김용호 목사님이 개척한 늘푸른교회에 출석했다.
감사하게도 대학원에서 좋은 교수님과 학우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용헌 교수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정말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다. 석사학위 논문 통과 후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서울 관악구 봉천로사거리 기사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제자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기사식당으로 가신 것이다.
또 대학원 학우였던 이재석 인천대 교수, 표양호 전 청와대비서관, 신원봉 영산대 교수, 전종훈 전 중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 한형조·이완우 한국학대학원 교수,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아산서원부원장 등과 더불어 재미있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다. 당시 대학원 신우회 회장을 맡아 연세대에서 파견 나오신 오인탁 교수님을 신우회 지도교수로 모시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어 박사과정에 진학해 김태환 교수님의 배려로 1987년 충남대에 출강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나는 89년 4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경찰대학 연구관으로 4년 동안 근무하면서 9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일반 대학의 길이 열려 교수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일반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야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나고 정치활동의 길도 열릴 텐데….’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 길이 막혀 버렸다. 이를 위해 작정기도도 많이 했지만 소용없었다.
낙담하던 차에 교회 집사님이 아내에게 문병현 장로님과 오대원 목사님이 세운 예수전도단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를 소개했다. 아내는 나에게 함께 훈련을 받자고 했다. 나는 “기도 응답도 안 되는데 피곤하게 무슨 교육이냐. 당신이 먼저 받고 변하면 나도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98년 혼자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 훈련을 받았다. 아내는 학교훈련을 받은 날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아내는 너무 은혜로워서 마치 구름 위에 떠다니는 기분이라며 붙들어 달라고 했다.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아내를 관망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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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20 0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