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갈등 해법을 찾자] 연금개혁, 산으로 안 가려면 ‘정치 사공’ 빼야 한다

입력 2015-05-19 02:25

최근 공무원·국민연금 논란은 ‘연금 정치(pension politics)’의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유럽에서 태동한 이 용어는 연금을 지지층 확보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각 정당이 벌이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연금 정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이 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표심을 잡는 게 선거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변수가 됐다. 하지만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성격의 공약 남발과 재정 부담 증대 등 부작용이 따라붙는다. 연금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연금 문제에서만큼은 ‘탈정치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연금 정치는 이미 시작됐다=우리의 연금 정치는 현재 시행 중인 기초연금의 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초연금의 전신은 ‘기초노령연금’이다. 참여정부 집권 시절인 2007년 법이 만들어졌다.

애초 참여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의 지급 대상을 ‘소득 하위 45% 노인’으로 계획했었다. 초안은 하위 30%였는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45%로 올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 숫자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협의 과정에서 60%로 늘어났다. 2007년 4월에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60%에게 평균 소득의 5%를 기초노령연금으로 지급하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개정된 법에서 지급 대상은 하위 70%로 확대된다. 한나라당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다. 한나라당은 애초 모든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자고 주장했다가 하위 80%에게 평균 소득의 20%를 주는 안을 내놓은 상태였다.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들은 노인연금 공약을 쏟아냈다. 2007년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 모두 기초노령연금 확대를 약속했다. 당선된 뒤 이명박정부는 이 문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2012년 박근혜 후보는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현 정부는 기초연금을 도입했으나 공약과 달리 소득 하위 70%에게 차등적으로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표(票)만 바라보는 연금 정치=기초연금 제도의 변화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야가 고유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와 전혀 상관없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2006∼2007년 한나라당은 진보 성향으로 평가받는 참여정부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모든 노인에 기초연금 지급’이라는 안을 내세웠다. 또 다른 특징은 일단 집권하고 나면 연금 문제에 무척 보수적이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와 공약후퇴 논란 속에서 제한적 기초연금 지급안을 밀어붙였다.

선거 때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다 집권한 후에 재정 한계를 깨닫는 모습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연금 정치의 현주소다. 각 정당은 연금 문제에 대해 어떤 기조도, 논리도, 일관성도 없다. 한 연금 전문가는 “2011년 국회에서 기초연금 도입에 관한 공청회가 4월과 8월 두 차례 열렸는데 한 번은 여당 추천으로, 다른 한 번은 야당 추천으로 나간 적이 있다. 코미디 같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최근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을 주장하다 갑자기 기초연금 강화로 방향을 튼 것도 연금 문제에 관한 고민이 축적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탈정치화’가 필요하다=연금 정치는 유럽 국가 상당수가 겪은 일이다. 조만간 우리에게 더 심각한 현실이 된다. 원종욱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인구 고령화 심화로 세대 간 의견 차이가 극명해지면 연금 정치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공무원연금 개혁이 올해 이뤄지지 못하면 그 여파가 내년 총선과 2017년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게 된다. 개혁이 이뤄지더라도 다가오는 선거에서 ‘개혁 성적표’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연금 개혁에 성공한 유럽 국가 대부분이 연금 문제에서만큼은 ‘탈정치화’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06년 보고서 ‘외국 연금개혁과정의 특징과 우리나라에의 시사점’에 따르면 스페인은 1995년 연금 문제를 선거 논쟁에서 다루지 않기로 의회에서 협정을 맺었다. 이후 정부와 노조가 협상해 연금 개혁을 단행했다. 스웨덴은 1994년 선거를 앞두고 연금 개혁을 쟁점화하지 않기로 5개 정당이 합의했다.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유럽 국가가 개혁에 성공한 비결이다.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우리의 연금 정치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단계”라면서 “이번엔 여야가 합의한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 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기구’에서 소득대체율 50% 상향 문제를 포함한 여러 종합대책을 내놓게 하고, 공청회 등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방식이 좋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