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1월 16일,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한 신문이 보도한 ‘김일성 사망설’ 기사 때문이었다. 이 신문은 이튿날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라는 제하의 호외를 발행, 설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김일성이 건재한 모습으로 북한 TV에 등장하면서 ‘세기의 특종’은 이틀 만에 ‘희대의 오보’로 막을 내렸다.
김일성은 이후 7년7개월을 더 살아 1994년 7월 8일 숨졌다. 김일성 사망 오보는 도쿄 외교가에서 나돌던 ‘찌라시’ 수준의 김일성 사망설을 토대로 구체적 확인 없이 기사를 작성해 빚어졌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에서 애도 음악을 내보내고, “민족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등의 방송을 했다는 당시 국방부 브리핑은 언론들의 오보 경쟁에 더욱 불을 지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비공개로 보고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설은 첩보다. 첩보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말하며, 어느 정도 사실 확인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활용 가능한 정보가 된다. 국정원은 정보위 보고에서 첩보라고 하면서도 “그 내용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고 토를 달아 현영철 처형설을 사실로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런 우리의 정보 능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북한은 국정원 보고 후 1주일이 다 되도록 확인도 부인도 않고 있다. 북한에선 숙청하면 모든 기록에서 이름과 영상을 없앤다. 장성택과 이영호도 숙청 1주일을 전후해 흔적이 말끔히 지워졌다. 하지만 현영철의 경우 비록 과거 영상이긴 하지만 지난 15일까지 거의 매일 삭제되지 않은 채 북한 TV에 등장했다. 이를 근거로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처형설이 과연 얼마나 신뢰할 만한 정보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숙청된 게 아니라 복권될 수도 있는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이다. 국정원이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북한이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한마당-이흥우] 첩보와 정보
입력 2015-05-19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