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는 연애시절에 툭하면 싸웠다. 4형제 중 장남이었던 나는 모든 여자가 우리 어머니 같은 줄 알았다. 외동딸이었던 아내는 모든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줄 알았다. 그러니 우리는 부딪치는 게 많았다. 그때 아내는 하나님께 “이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맞습니까”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다”라는 응답을 주지 않아서 계속 만났다고 했다.
아내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나를 전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자기가 다니던 죠이선교회 선배 집으로 나를 두 번이나 데리고 갔다. 주변에서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아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이동원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 침례교회이다. 그곳에서는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왔다. 1980년 겨울 이동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마지막 즈음에 “오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분은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날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갔지만 여전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교제를 하면서도 믿음 등으로 자주 부딪쳤고 결국 1981년 봄에 헤어졌다. 나는 아내와 싸우면서 공부가 되지 않았고 아내는 변화되지 않은 나를 보고 절망감에 빠져 헤어진 것이다.
아내와 헤어진 후 나는 고시공부에 더욱 집중했다. 마침 국회에 입법고시 공고가 나서 시험을 봤는데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떨어졌다. 동생들도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해 국영기업체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곳이 포항제철(포스코)이다. 합격소식을 듣고 아내를 만나러 서울 침례교회로 갔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 친구에게 그녀의 소식을 물어 보니 돈을 벌기 위해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고 했다.
나는 아내 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부모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모아둔 돈은 없지만 열심히 살겠다며 결혼 허락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다 잘못했으니 사우디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했다. 당시 아내는 내 편지를 받고 이전보다 신앙이 좋아진 것 같아서 다시 나와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83년 1월 8일 추운 겨울날 우리는 서울 중구 한국YWCA에서 결혼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모은 돈이 없어 경북 포항 대도동에 3만5000원으로 월세를 얻었다. 방 하나 부엌 한 칸인 작은 집이었고 살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포항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정치인이 되려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하고 바위에 올라가 하나님께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목이 쉬도록 기도했다.
83년 10월 12일 우리 집에 사랑스러운 딸 은혜가 태어났다. 은혜가 태어난 즈음 우연히 신문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학생 모집 공고를 보았다. 모든 것이 국비장학생이어서 나에게 딱 맞는 대학원이었다. 시험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시험을 봤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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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19 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