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7) 시련 딛고 선교 거점된 정동

입력 2015-05-19 00:24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는 영아소동의 위기를 딛고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근대 여성으로서의 자각을 심어줬다. 사진은 정동 언덕에 자리잡은 이화학당 건물과 윌리엄 스크랜턴의 시병원 전경(위쪽부터).

메리 스크랜턴은 휴양 차 1888년 5월 초 일본을 방문했다. 내한 3년 만에 처음으로 쉴 수 있는 여유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안식도 잠시, 이 시기 서울에서 ‘영아소동’으로 불리는 소요 사건이 터져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이 금지되고 선교부 주택과 기독교학교 및 병원이 군중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선교사들의 종교 활동과 연계하여 추진되는 진보 세력의 개화 및 근대화 운동에 불만을 품은 봉건적 수구 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다.

영아 소동이 선교의 기회가 되다

그 즈음 천주교회의 명례방(현 명동) 성당 건축사건이 터졌다. 1886년 6월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인 사제들은 종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파악하고 공세적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블랑 주교는 남산 명례방 언덕에 5층 높이 종탑을 갖춘 고딕식 벽돌 성당을 건축해 박해 1세기를 이겨낸 신앙의 승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런데 정부 관료들은 서울시내뿐 아니라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남산 언덕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건축 포기 및 자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천주교회 측은 종교 자유를 내세우며 공사를 강행했다. 이에 정부는 1888년 4월 22일, 서울 주재 외국 공사관에 통상사무아문(외부) 조병식 독판 명의로 “야소교의 포교인들, 전도인들이 서울에 와서 전교하는 것은 조약의 조문에 들어있지 않으니 오직 그 나라 정부로부터 임명된 사람 이외에는 어떤 신교나 어떠한 종류의 학당이라도 엄금하여 허락지 않는다는 뜻을 포교인들에게 훈계하여 줄 것”을 통보했다.

이런 조치는 천주교뿐 아니라 개신교까지 포함해 “외국인들의 모든 종교 활동을 금한다”는 칙령으로 해석됐다. 미국 공사 딘스모어도 서울 주재 각 교파 선교부에 이런 내용을 알렸다. 선교사들은 이에 따라 공개 활동을 중단하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메리 스크랜턴도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6월 들어 원산을 비롯한 지방 몇 곳에서 어린아이 실종 사건이 터졌다. 수구파는 이를 선교사 배척운동으로 연결시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아이들을 잡아다가 삶아 먹거나 미국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트렸다. 흥분한 군중은 정동 선교부로 몰려왔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시병원 등이 군중들의 공격을 받았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인천에 주둔하던 프랑스와 미국, 러시아 함대 수병들이 서울에 들어와 거리를 행진하며 군사 시위를 벌였다. 조선 정부도 경찰력을 동원해 선교사 주택과 병원, 학교를 보호했다. 선교사에 대한 오해를 풀라는 국왕의 방문도 내붙였다.

소요는 6주 만에 진정됐지만 후유증은 지속됐다. 종교 활동에 대한 정부의 공식 금령은 여전히 발효 중이었고 무엇보다 선교 사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남대문 안 벧엘예배당 집회가 중단되면서 얼마 되지 않던 교인들은 흩어졌고, 시병원과 배재학당, 이화학당은 상당 기간 문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수구세력의 음모가 드러났고 오히려 선교사들의 진의가 알려지면서 민중들은 선교사들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갖게 된 조선 여성들

메리 스크랜턴은 영아소동 광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1888년 9월, 이화학당의 문을 다시 열었다. 또 메리 스크랜턴의 집에서 재개한 주일저녁 ‘여성 집회’에도 (선교부 바깥의) 외부인들이 다시 참석하기 시작했다. 집회를 찾는 ‘믿음의’ 여성들은 늘어났고, 부인들은 예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경공부와 교리 교육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한 3년 차 메리 스크랜턴이 직접 한국어로 강의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남성 매서인에게 요청했다. 대신 부인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엄격한 남녀 구분의 문화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안한 게 ‘방안 휘장’이었다. 부인과 매서인 사이에 휘장을 쳐서 목소리만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휘장 집회’ 참석자는 꾸준히 늘었다. 이는 곧 여성 세례교인 증가로 이어졌는데, 당시 한국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남성의 소유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면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줬다. 마르다 미리암 살로메 같은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수백년 동안 이름 없이 살아온 조선 여성들에게 이름이 생겼다.

이화학당 초기 학생인 여메레(Mary)와 박에스더(Esther), 하란사(Nancy)를 비롯해 양우로더(Rhoda), 손메레, 노살롬(Shalom), 주룰루(Lulu), 김활란(Helen), 차미리사(Mellisa), 김로득(Ruth), 황애덕(Esther) 등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주역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얻은 여성들이 느꼈을 감격은 선교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초기 교회 여성에게 세례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종교적 의미와 함께 여성에게 일방적 굴종을 강요했던 가부장 제도와 봉건적 질서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의미했다.

교회 여성들은 신앙을 가지는 행복함을 경험했고 믿는 여성도 증가했다. 이에 아펜젤러는 1889년 2월 여성들만으로 속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9월 개최된 한국선교회 제5차 매년회에서 여성들만의 교회를 설립한 후 올링거 선교사가 담임자로 파송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여성교회는 같은 기간 배재학당에서 모인 남성 참석자의 두 배 이상 됐다. 이후 여성교회는 1897년 12월, 정동에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집회를 할 수 있는 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을 마련할 때까지 10년 동안 독자적 교회로 유지되면서 여성 선교와 교육, 계몽활동의 구심점이 됐다.

한편, 미 감리교 해외여선교회는 메리 스크랜턴이 확보한 정동 여선교부 부지 안에 독자적 여성 병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이화학당 언덕 아래, 시병원과 담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기와집 한 채를 병원으로 개조해 1888년 10월 문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이었다. 이 병원에도 국왕의 ‘사액 현판’이 내려왔으니 이름은 ‘보구여관(保救女館)’이었다. ‘병든 여인들을 구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