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언제나 나와 동생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내성적이셨던 아버지와 사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어머니는 우리에게 근면과 성실함을 삶으로 알려주셨다. 그래서 우리 가정은 가난했지만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공고에 입학했다. 집안 형편상 대학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문계 진학을 포기했다. 서울공고에 다니면서 ‘이과’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고려대 시험을 쳤으나 떨어져서 재수를 했다. 친구들은 대입 종합반을 다녔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막노동을 하면서 학원비를 모으며 공부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1973년 고려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왔으나 대학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또 점심 먹을 돈이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리더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고시공부를 하던 1979년 1월 19일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수박색 스웨터를 입은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내 아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간호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 몰랐다. 그녀는 지금의 아내인 박옥희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그녀가 밤에 근무할 때 커피를 한 잔 뽑아 줬다. 그랬더니 그녀는 “환자 보호자가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하루는 일부러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버스 정류장에 나가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돌아오는 주말에 시간이 되면 차나 한 잔 하자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만나기로 한 날 서울 광화문 다방에서 2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여자라고 나를 바람맞히나.’ 나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이젠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근무하는 병원에 자주 갔다. 환자 보호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내는 고려대 1년 후배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됐다.
만난 지 몇 개월 지난 후 우리는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갔다. 가는 길에 그녀에게 결혼 배우자로 어떤 사람을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교회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하는데 이 여자하고 결혼하면 집안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녀에게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데 종교가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럼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마음에 갈등이 있었지만 결혼할 생각으로 그녀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내 삶이 곤고하고 죽음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는데, 장가갈 마음으로 교회에 나가니 목사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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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18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