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군이 된 청년 전도사 그의 마지막 기도는?… 예장통합 ‘문용동 전도사 순교 기념예배’ 엄수

입력 2015-05-15 00:15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사회봉사부와 인권위원회, 호남신대 총동문회 관계자들이 14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문용동 전도사의 묘소 앞에서 추모기도를 하고 있다. 광주=강민석 선임기자
1980년 5월 26일. 광주 전남도청 지하실 앞을 지키고 있는 청년에게 누나와 형수가 찾아왔다. 계엄군이 밀어닥치면 다 죽는다며 집에 가자고 했다. 며칠을 밤샌 탓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울고 있는 가족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내가 나가면 누가 여기를 지키겠어요.”

이튿날 새벽 계엄군이 도청으로 밀고 들어왔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선무방송이 그의 귀를 때렸다.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그 순간 청년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결국 그는 투항을 결심했다. 손에는 어떤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도청 정문을 열자마자 청년의 가슴에는 세 발의 총탄이 박혔다.

고(故) 문용동(1953∼1980·사진) 전도사의 삶이 소개되자 14일 오전 광주 남구 호남신대(총장 노영상) 대강당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곳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사회봉사부와 인권위원회, 호남신대 총동문회 주최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35주기 및 문용동 전도사 순교 기념예배’는 내내 숙연했다.

문 전도사의 호남신대 동기인 최덕기 목사는 “35년 전 역사의 밀알로 심겨진 그는 하나님을 올곧게 믿었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문 전도사는 80년 5월 18일 당시 섬기던 상무대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공수부대원에게 폭행당하던 노인을 돕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21일 전남도청에서 결성된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해 지하실의 무기관리 임무를 맡았다. 당시 군의 잔인한 진압과 집단발포 이후 광주시민들은 탄약고와 경찰서 등에서 총기류와 실탄, 수류탄 등을 탈취해 자체 무장을 강화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500여정의 총기와 대부분의 폭약이 전남도청 지하에 보관됐다.

문 전도사는 보관 중인 폭약이 폭발하면 광주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 폭약의 뇌관 분리를 결정했다. 폭약에 대한 지식이 없던 문 전도사는 상무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상무대에서 파견 나온 군인은 뇌관 분리작업을 마쳤다.

최 목사는 “이 일을 두고 문 전도사가 폭발물 뇌관을 분리해서 계엄군이 쉽게 도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며 “하지만 그는 뇌관 분리를 끝내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무기고를 지키지 못해 폭발이 일어났다면 도청 반경 3㎞ 일대가 파괴돼 광주가 반쪽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예배에서 ‘죄악의 낙보다 의로운 고난을’을 제목으로 설교한 예장통합 직전총회장 김동엽 목사는 “이 땅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 크리스천의 사명”이라며 “문 전도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최후의 시민군으로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순교자적 신앙을 실천했다”고 평가했다.

참석자들은 예배 후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문 전도사의 묘소에 참배했다. 예장통합 전남·광주·광주동노회는 오는 9월 제100회기 정기총회에서 문 전도사의 순교자 지정을 안건으로 상정할 계획이다.

광주=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