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요셉 (3) 초등학교 2년 때 콜레라… 하나님 은혜로 살아나

입력 2015-05-15 00:07
서울공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뒷줄 오른쪽).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신 부모님은 판자촌에 세 들어 사셨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막내 동생을 낳고 시골에 있던 나와 두 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이 넷이나 돼서 비좁아 이사를 가야 하는데 부산에서 방을 얻기가 힘들었다. 부모님은 부산에 온 지 몇 년이 지난 뒤 빚을 얻어 언덕 위에 있는 슬레이트집을 샀다. 부산은 원래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다. 바람이 불면 지붕이 들썩들썩하고 널빤지로 만든 담은 쓰러지곤 했다. 어머니는 늘 나와 동생들에게 “바람 안 부는 집에서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부산에 왔다고 해서 우리 집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림살이에 더 보탬이 되고자 반찬 가게를 여셨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껏 먹지 못했던 나는 어느 날 카스테라가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가게에서 돈을 훔쳐 그 돈으로 카스테라를 사 먹었다. 빵을 다 먹고 나자 ‘어머니한테 들키면 맞을 텐데’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결국 어머니한테 들통 나서 죽도록 맞았다. 그때 어린 마음에 ‘죄 짓고는 못 사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재일교포였던 당숙께서 고향이었던 경남 함안에 ‘동광사’라는 큰 절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그 공사를 맡으셨고 어머니는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려고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부산 삼촌 집에 있던 나는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렸다. 거의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 지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나는 다행히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 콜레라 덕분에 초등학교 2학년 과정에 1년 더 다녔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교육을 받지 못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다며 나와 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또 집안 어른들은 평소 나에게 “용관(개명 전 이름)이가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가족은 당숙의 권유를 받아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 생활은 부산보다 더 힘들었다. 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었다. 시골에서 살 때처럼 호롱불을 켜야 했고 개천 옆에 있는 샘을 파서 마셔야 했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서울 수돗물을 먹어서 그런지 용관이의 얼굴이 희다”고 칭찬했다. 나는 대답도 못하고 그냥 웃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문창초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친구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렸다. 그러던 와중에 초등학교를 3번이나 옮겨 공부에 대한 의욕도 상실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를 도와 논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은 여름만 되면 집 옆 개천의 둑이 터져 물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장마철마다 어머니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쌀을 담는 부대를 얻어 터진 둑을 막아야 했다.

서울에 온 후 크리스마스 때 친구 따라 교회에 한 번 간 적이 있으나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닐 생각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원하는 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결국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