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가정의 달 (2)

입력 2015-05-16 00:20

지난 칼럼에서 아직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연령의 아이들을 엄마에게서 떨어뜨리고 엄마는 대예배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이번엔 그 이유를 말하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최후의 전투인 아마겟돈 전쟁이 언급되어 있다(계 16:16). 이 전쟁에서 선은 악을 이기고 승리하며 그리스도가 새로운 세상을 통치하는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계 20:4). 흥미롭게도 인간 발달과정에서 이와 흡사한 시기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미운 세 살’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미국에서는 ‘Terrible two(끔찍한 두 살)’라고 부른다. 나이를 만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바로 아마겟돈 전쟁이다. 아이는 심하게 변덕을 부리기 때문에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커다란 고비를 지난 아이답게 안정을 보이고 심지어는 이제 엄마로부터 떨어져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유치원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마가렛 말러는 이 시기의 변화를 가리켜 ‘대상 항상성’이라고 불렀다. 대상 항상성의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일관되고 통합된 하나의 어머니 표상이다. 둘째는 표상의 내면화이다. 달리 말하면 엄마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엄마는 이제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먼저 두 엄마가 하나의 엄마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겠다. 이는 아마겟돈 전쟁이 선과 악의 최종 대결인 것과 동일하다. 그동안 아이에게 보인 엄마의 다양한 면은 크게 두 축으로 정리되어 선한 엄마와 악한 엄마로 대비된다. ‘미운 세 살’의 시기에 아이는 이 두 극단에 대한 반응을 첨예하게 드러내며 변덕을 보이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이 승리하면 평온이 찾아오듯이 좋은 엄마가 득세하면 ‘전체적으로 좋은 엄마’로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커서 마음의 안정성 없이 두 극단의 감정을 번갈아 나타내는 매우 불안정한 심성을 가지게 된다.

둘째로 엄마의 표상이 내면화되는 것을 살펴보자. 그 전까지 엄마는 마음속에 분명하게 자리 잡지 못한다. 엄마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분명하지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원인에 기인한다. 바로 아이의 기억이 아직 완전하게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 3세를 전후로 하여 기억의 기능이 완성됨과 동시에 엄마와의 관계도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엄마는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엄마가 눈앞에 안 보이면 아이는 울고 불안정해진다. 만 3세 이전의 아이들이 엄마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은 단순한 칭얼거림이 아니라 아직 불가능한 과제인 것이다. 물론 다 못 견디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웬만하면 다 견딘다고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굳이 이 주제를 지난 칼럼에 이어서 꺼낸 이유는 바로 교회와 가정에서 교회를 우위에 두는 관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도록 권고하기 위함이다. 엄마가 만 3세가 안 된 아이를 보육시설에 의존하려는 것은 직업이나 다른 부득이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바람직하지 않으며, 교회에서 이 연령의 엄마와 아이를 공간적으로 떨어뜨리려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가정의 원리를 존중하는 교회의 성원이 사회에서도 일관된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