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시여! 니 깨우니라 가뭄에 콩밭처럼 바싹 말라 분 내 입천장은 어칙할 텨!”
아이들을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로 아침이 시작되는 건 1979년 전남의 한 농촌 마을에 사는 이 가족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준호의 눈으로 그려가는 가족의 일상적 행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돼지장사를 하는 아버지,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마을에서 영재로 통하는 형 준영, 공부는 못하지만 꿈은 대통령인 나, 그리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군소리 없이 하는 막내 순화. 가난하지만 단란한 농촌 가정의 에피소드가 걸쭉한 남도 사투리 속에 펼쳐져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웃음 짓게 한다. 공부는 잘 하지만 마냥 느리기만 형, 똑순이처럼 일하지만 무시로 작은 오빠인 자신을 약 올리는 여동생…. 시대를 달리하지만 지금도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남매간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정겹다.
책은 준호네 가족 뿐 아니라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 농촌 사람들의 전형을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예컨대 원광이네 아버지는 ‘공부해서 뭐 하냐’며 아들이 학교 가는 시간도 아까운 사람인데, 그 시절엔 그런 집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학교 갈 때 원광이집에 들른다.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집을 나서지 못하는 원광이를 빼내오기 위해서다.
준호네 집에도 고민은 있다. 전답을 다 잃고 돼지장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자격지심에 한번씩 동네가 떠나갈 듯 술주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공부 잘하는 큰 아들이 학교에 무단결석하며 반기를 들자 금주선언을 한다. 그 기대에 부응해 광주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큰 아들…. 남루하지만 열심히 살아갔던 준호네 가족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 ‘국제시장’보다 더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비극, 80년 5월의 ‘광주 사태’는 이 가족의 행복을 불꽃의 혀처럼 삼켜버린다. 광주에 유학을 간 형이 오는 날을 기다려 ‘나’는 생일까지 뒤로 미뤘건만 그날도, 그 후로도 형은 끝내 오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고, 중·고등학생까지 가담한 그 시위에서 형은 계엄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소설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무겁게 가라앉은 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쁜 놈덜. 어린 것들 목심은 왜 뺏어가. 세상을 뺏어 갔으면 됐지.”
그런 절제가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광주에 관한 소설이다. 2013년 5·18 광주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작품으로, 청소년 소설의 성격 때문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개인사와 친구의 가족사를 합친 작가의 첫 소설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청소년 책-빼앗긴 오월] 광주에 유학간 형은 ‘5월’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입력 2015-05-15 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