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초기 처음으로 아기 심장소리를 들은 그 기쁨으로 3년 동안 두 아이를 품는 과정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선택권이 없는 새 생명들에게 매일매일 독성물질을 먹였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두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낸 권민정 주부. 그는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을 몰라 매일 태아에게 독성물질을 먹인 것에 다름없다”며 “수많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묵인하고 이익창출만 바라보는 기업과 그를 옹호하는 무지한 정부는 하루 빨리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씨와 같이 마트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수백명에 달한다.
최근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인해 현재까지 500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또 한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나와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환경보건센터와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은 ‘옥시싹싹’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이시연(45·여)씨가 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센터에 따르면 이씨는 2001년 둘째 아이 출산을 전후해 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기 시작해 2011년까지 겨울마다 매달 3∼4개씩 제품을 꾸준히 사용해 왔다. 2001년 말부터 폐섬유화증 등 각종 폐질환에 시달린 이씨는 지난달 환경부의 가습기살균제와 질환 간의 인과관계 2차 조사에서 ‘거의 확실’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충남대병원에 입원했고 갑작스럽게 지난 9일 낮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또한 센터는 지난해 4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조사결과 발표 때 살아있던 다른 성인 피해자 한 명도 현재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사고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지 약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한 피해신고는 약 530건이며 이 중 환자는 390명, 전체 사망자 수는 최근 사망한 이들까지 합치면 총 142명이 됐다. 피해자 530명 중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1∼2단계 판정을 받은 이는 221명에 불과하며, 건강모니터링 지원을 받는 3단계 판정을 받은 이는 61명이다. 가습기살균제와 피해와의 인과관계 가능성이 거의 없는 4단계 판정을 받은 240명은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지난 2011년 6월 당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생명을 잃을 뻔했던 강나래 양의 아빠이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가족모임의 강찬호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째인 지금 우리들의 피해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여전하다”며 정부의 빠른 원인 규명을 촉구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세월호 사건과 다름없다. 국민이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사건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가습기살균제가 폐 이외 장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할 서울아산병원 환경보건센터가 12일 문을 열었다. 환경부(장관 윤성규)는 서울아산병원 환경보건센터를 유해화학물질 노출 분야 환경보건센터로 지정하고 12일 개소식을 진행했다. 환경부는 2007년부터 환경성질환으로 인한 건강피해 규명·감시예방 및 조사·연구를 위해 병원 등을 환경보건센터로 지정해 연간 3억5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삼성서울병원, 고대안암병원, 서울대 의과대학 등 14개 센터가 운영 중이다. 이번에 개소한 유해화학물질 노출 분야 환경보건센터는 가습기살균제 등 유해화학물질 노출과 건강영향의 인과관계를 조사 연구한다.
특히 현재 진단이나 판단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에 의한 폐 이외 장기의 영향에 대해 조사 및 연구를 실시할 계획이다. 환경보건센터로 지정된 서울아산병원은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아산병원은 지난 2011년 4월 7명의 원인미상의 중증 폐질환자들을 발견해 질병관리본부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러나 원인규명이 명확히 된다 하더라도, 책임소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편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화학물질의 수는 10만 가지가 넘는다. 이 화학물질이 모두 안전성이 검증된 상태에서 사용되지는 않는다.
독성이나 인체영향, 환경 피해 등이 충분히 평가되지 않은 채 쓰이는 일이 상당히 많다.
노동환경연구소에 따르면 화학물질 중에는 건강과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 있다. 흔히 고위험물질(발암물질·돌연변이물질·생식독성물질·환경호르몬·분해되지 않고 장기간 생태계에 축적되는 물질 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노동환경연구소 관계자는 “외국은 정부 차원에서 발암물질처럼 위험한 화학물질 정보를 생산하거나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이 금지물질 목록을 공표하고 사회 캠페인을 벌이는 등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적극적”이라며 “그렇지만 불행히도 한국은 이러한 노력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장윤형 기자 vitamin@kukimedia.co.kr
[암과의 동행-환경과 건강]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또 사망… 끊이지 않는 공포
입력 2015-05-18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