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요셉 (2) 유년의 거짓 메시지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

입력 2015-05-14 00:16
조요셉 목사(앞줄 왼쪽)는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가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경남 함안군 산인면이란 작은 동네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남인 아버지는 13세부터 동생 세 명과 할머니를 부양하셨다. 아버지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함경북도 중강진과 중국 만주까지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아버지 가족이 너무 궁핍하게 사는 것을 본 이웃 사람이 보다 못해 아버지에게 아이가 없는 일본인에게 막내 삼촌을 양자로 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혈육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하셨다. 막내 삼촌은 지금도 그것에 대해 아버지께 고마워하신다.

아버지는 중강진과 만주로 이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결국 타향살이를 끝내고 귀향하셨다. 그리고 6·25전쟁이 끝날 무렵 중매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나를 낳으셨다. 나는 한동안 아기가 없던 가정에 태어나 할머니와 삼촌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서 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했다. 방과 부엌이 한 칸씩 있는 좁은 초가집에서 할머니와 세 명의 삼촌, 나, 부모님 모두 일곱 식구가 살았다. 부모님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자로 나중에 동네 야학을 통해 겨우 한글을 배우셨다.

우리 소유의 땅이 없었던 부모님은 소작농을 하시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보리밥을 먹었다. 쌀밥은 명절이나 제삿날에나 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밖에서 놀다가 집에 오면 먹을 것이 없어 마루 선반에 얹어 놓은 보리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난 곳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가족 중 신앙을 가진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특히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과 손주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셨다. 할머니는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빌어주시던 반무당과 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가 없었던 한 친척이 울산에 사는 어느 청년을 양자로 입양했다. 나중에 그분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지자 집안에서 ‘예수쟁이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며 난리가 났다. 당시 우리는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실제 예수쟁이가 양자로 들어왔으니 큰일 났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들었던 ‘예수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거짓 메시지가 나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나는 아내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20대까지 아예 예수를 믿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 집이 이미 완전히 망해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었는데 말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고향에서 친구들과 산과 들에서 마음껏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학교 가는 것을 보고 따라 가겠다고 해서 7세에 입학했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다가 미장일을 배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