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백제 속으로
공주 금강변에는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장관이 있다. 금강신관공원에서 바라본 공산성의 야경은 지나가던 여행객의 마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성벽길을 따라 수놓아진 조명은 그대로 금강 수면 위로 데칼코마니처럼 반영을 그리며 황홀한 손짓으로 유혹한다.
다음날 찾은 공산성은 전날의 수려한 불빛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섰다. 빛에 가려진 굴곡진 역사가 시공을 초월해 한꺼번에 쏟아진다.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서문이자 현재의 공산성 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錦西樓)로 들어서면서 고대 백제로의 ‘시간여행’은 시작된다. 먼저 ‘타임머신’은 5세기 후반 백제시대로 간다. 475년 백제의 도성인 한성 위례성이 고구려의 침략에 의해 함락된다. 이후 백제 22대왕으로 즉위한 문주왕(文周王·재위 475∼477년)이 웅진으로 도읍지를 옮긴다. 백제 웅진 시대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된 고대 성곽이 공산성이다. 이때부터 성왕(聖王·재위 523∼554년) 16년(538년)에 사비(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자리매김한다. 공산성을 빼고 백제 웅진 시대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존재감은 막중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이후 신라는 웅천주를 뒀다. 고려 때에 이르러서야 공주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조선 세종 때 진을 세웠다. 갑오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에는 충청감영이 있었다.
타임머신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금서루 아래 성문으로 들어와 금서루 옆에 섰다. 남쪽으로 공주 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벽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올라서자 멀리 공산정이 눈에 들어온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방문객들도 적지 않다. 다시 내려와 반대편으로 올라서 공산정에 다다르자 전날 야경을 관람했을 때와는 반대로 금강신관공원이 내려다보인다. 금강 건너 북쪽의 신시가지와 금강철교, 연미산 일대가 훤히 내다보인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금강 끝자락에 노을이 걸쳐져 금강을 붉게 물들일 황홀한 낙조 풍경을 상상해본다.
공주는 금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나뉜다. 서울과는 반대로 강남이 구시가지, 강북이 신시가지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바로 신시가지인 신관동 일대인데 높고 넓은 공주 대학교 건물만 봐도 세련된 느낌을 알 수 있다.
성 안쪽으로 내려서면 신록에 싸여있는 고즈넉한 옛 목조건물이 발길을 끈다. 공산성 누각 중 가장 큰 임류각이다. 공산성은 성곽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성 안에 위치한 누각 등이 지닌 역사적 의의도 간과해선 안 된다. 임류각도 그 중 하나다.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년) 22년(500년)에 궁성 동쪽에 세운 누각으로 연회장소로 쓰인 곳이다. 1993년에 복원됐다. 삼국시대 목조 건물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의 목조 건물 양식을 참고했다.
공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다시 축조된 것이다. 현재 석축 약 1.8m, 토축 약 390m로 2중으로 쌓여 있다. 토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쪽 성벽은 성곽 안쪽의 넓은 산책로와 달리 좁고 가파르다.
동문루를 지나 좁은 길을 내려서면 진남루(鎭南樓)에 닿는다. 남문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이 모두 이 남문을 같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삼남문이라고도 불린다.
정자가 있는 곳에 이르면 넓은 대지마다 울타리들이 둘러져 있다. 웅진 시대 초기 왕궁터로 추정되는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를 표시해둔 것이란다.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곳이다.
공산성은 백제가 아닌 고려시대 때 사용된 명칭이다.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 불렸다. 백제의 왕성이지만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다수 발견될 정도로 역사도 깊다.
‘백제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준 무령왕릉
타임머신은 공산성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무령왕릉으로 향한다.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년) 부부가 합장된 전축분(벽돌무덤)이다. 1971년 송산리 제5·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됐다. 모두 108종 4600여점의 유물이 발견돼 이중 12종 17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발굴 이후 백제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이 활발히 이뤄져 베일에 싸였던 고대국가 백제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 역사적인 곳이다.
부장품 중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돼 있다. 지석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삼국시대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서다. 이 지석은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의 신빙성을 높였으며 백제인들의 사상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돼 백제사 연구에 있어 가치가 매우 큰 유물이다.
지석과 더불어 이곳에서 발견된 관장식과 장신구, 생활용품도 대단하지만 무덤 벽돌의 제작 수준과 공법은 당대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 이후 일반에게 공개돼 출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1997년 왕릉을 정밀 조사한 결과 누수현상 등으로 훼손이 우려돼 원형보존을 위해 영구 폐쇄되고 대신 모형관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모형관 내부에는 5·6호분도 함께 복원·전시돼 있어 왕릉 관련 전문 정보가 가득하다.
공주=글·사진 남호철 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