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안대로 (보험료율) 12.9%에다 (소득대체율) 50% 정도로 해야 재정 안정화도 이뤄지고 연금의 푼돈화를 방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정부 측에서는 어떻습니까?”(양승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2007년 4월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재정 안정화 측면에서는 당초 정부안인 12.9%에 50%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당시 변재진 보건복지부 차관)
“아무리 판단해도 그것이 적정하지요?”(양 의원)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변 전 차관)
국민연금 보험료율 상향과 소득대체율 문제는 8년 전에도 최대 쟁점이었다. 참여정부는 보험료율을 9%에서 단계적으로 12.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50%로 내리자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법안은 2007년 4월 2일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합의했다. 보험료율을 9%로 유지하고 소득대체율을 단계적으로 40%까지 내리기로 했다. 이렇게 고쳐진 개정안이 그해 7월 국회를 통과했다. 복지부 고위 간부가 ‘아무리 판단해도 적정하다’는 정부안은 사라졌다. 정부안에 동의하는 듯했던 양 의원은 당 차원에서 합의가 이뤄진 뒤인 6월 29일 법안심사소위에서 회의를 주관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연금의 보험료율은 현행대로 9%를 유지한다, 이것은 이의 없으시지요?”
김충환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답했다.
“예, 이의 없습니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현재의 혼란은 표심(票心)만을 생각했던 과거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역사에 가정은 불가능하지만 2007년 정부가 내놓은 원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면 지금의 혼돈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려던 안을 여야가 함께 뒤집은 200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보건복지부와 전문가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은 보험료율 상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88년 3.0%로 출발해 93년 6%, 98년 9%로 오른 뒤 17년간 제자리다. 수년마다 장기 재정추계를 반영해 보험료율을 조정하는 다른 나라와 대조적이다. 일본의 후생연금(직장인 연금)은 1980년대부터 보험료율이 두 자릿수다. 현재 우리의 두 배에 가까운 17.474%이고, 2017년 9월부터는 18.3%로 다시 오른다.
우리의 보험료율은 9%로 고정돼 있지만 연금 수급자가 받는 돈은 해마다 늘고 있다. 올해도 국민연금 수령액은 2.2% 증가했다. 물가상승률 등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저출산 고령화’와 ‘일하는 인구의 감소’라는 변수가 아니더라도 연금 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도 최근 “기금 고갈 없이 국민연금을 유지하기 위해선 12∼13% 수준의 보험료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어느 시기에 얼마만큼 보험료를 올려야 할지 일정표가 없는 상황이다. 2003년과 2008년, 2013년 등 세 차례 국민연금 장기 재정추계 결과가 나왔을 때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룰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론의 반발과 눈앞의 표를 의식해 스스로 기회를 내팽개쳤다.
2003년 장기 재정추계 결과가 나온 뒤 정부는 2004년 ‘보험료율 15.9%’ 상향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 소득대체율을 낮추되 보험료율은 그대로 두자고 제안했다. 법안을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유시민 의원이었다. 장관이 되기 전에는 그도 보험료율을 올리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같은 해 한나라당에서는 한술 더 떠 보험료율을 7%로 낮추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명박정부 때인 2008년 이대로라면 2060년 기금이 고갈된다는 재정추계 결과가 나왔지만 보험료율은 성역이었다. 당시 재정추계 및 안정화 작업에 참여했던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금 재정이 부족해지면 자동으로 연금을 깎는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춘 지 1년 만에 또 제도를 바꾸면 국민이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아 2013년으로 미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금 개혁이) 후퇴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2008년은 정부가 ‘광우병 쇠고기’ 사태로 정책 추진 동력이 매우 약했던 시기다. 이명박정부는 이후 임기 말까지 보험료율 상향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2013년 재정추계 결과도 5년 전과 비슷했지만 정치권은 또 다시 모르는 척했다. 박근혜정부는 정권 초기 기초연금 도입을 둘러싼 내부 갈등도 매끄럽게 풀지 못했다. 국민연금보다는 공무원연금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의지가 없으니 주무 부처인 복지부도 국민연금 보험료율 상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간 경쟁적으로 내놓은 ‘무상복지 공약’이 현 정부 출범 이후 최근까지 논란이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윤 연구위원은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공약이 잇따르면서 국민이 고통스러운 문제는 정책 당국에서 먼저 꺼내기 어려운 정치 지형이 됐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국민연금 개혁 시기를 ‘추후에’라고 밝혀 남은 임기에서도 보험료율은 섣불리 건드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서는 역대 청와대와 여야가 국민뿐 아니라 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보험료율 올리는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보험료율을 올리면 직장가입자가 추가로 부담하는 보험료의 절반을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013년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사회보험비용이 88조7960억원이며 2023년 225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역대 정부가 보험료율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로 ‘국민의 저항’을 거론했을 때 그 이면에는 ‘기업의 부담이 증가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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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12 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