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든 드라마든 최고 권력자 왕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은 언제나 흥미롭다. 역사적인 사실(팩트)에 가상의 스토리(픽션)를 적절히 가미시키고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을 캐스팅하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팩션이 탄생한다. 현재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KBS ‘징비록’은 선조 시절 역사 고증에 충실한 사극이고, MBC ‘화정’은 광해군 시절 지어낸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드라마다.
영화에서도 임금이 등장하는 ‘대박 사극’이 종종 탄생했다. 연산군의 에피소드를 다룬 ‘왕의 남자’(2005)가 1051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광해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그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1232만 명을 동원했다.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나오는 ‘관상’(2013)은 913만 관객을 불러들였다. 반면 정조 시절의 역모사건을 다룬 ‘역린’(2014)은 384만 명에 그쳤다.
올해 개봉된 ‘순수의 시대’는 태종 이방원의 왕자 시절 권력다툼을 소재로 했으나 46만 명만 찾는 참패를 맛봤다. ‘역린’과 ‘순수의 시대’의 흥행 실패는 사극 영화에 교훈을 던졌다. 아무리 스타 배우(‘역린’은 현빈, ‘순수의 시대’는 장혁)를 내세워 왕의 뒷이야기를 극화하더라도 역사적인 사실과 너무 동떨어진 시나리오는 관객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는 21일 개봉되는 민규동 감독의 ‘간신’은 폭군으로 평가받는 연산군 시절 권력에 빌붙어 패악을 일삼은 간신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는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를 채홍사로 하고 전국의 계집을 간택해 오라”고 어명을 내린 ‘연산군일기’와 “작은 소인은 숭재요, 큰 소인은 사홍이라.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라고 기록한 ‘중종실록’을 근거로 얘기를 풀어냈다.
‘내 아내의 모든 것’(2010)으로 460만 관객을 동원한 민 감독이 사극에 도전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또 연기파 배우 김강우가 연산군 역을 맡고 주지훈과 천호진이 임숭재와 임사홍을 각각 연기해 신뢰감을 주었다. 조선 팔도 1만의 미녀를 왕에게 바쳤던 역사적 사건인 ‘채홍’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작품 의도는 또 다른 재미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다.
11일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간신’은 패악이 절정에 달했던 연산군과 권력 주변을 맴돌며 악명을 떨친 간신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 없고 흥청망청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왕과 이를 부추기는 간신. 왕의 총애를 얻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인들. 영화는 괴팍한 성격의 왕이 결국 패망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비운의 역사에는 항상 여인이 있게 마련이다. 임사홍 부자가 채홍사로 활동하며 끌어 모은 여인 가운데 백정 출신 단희가 있다. 알고 보니 임숭재의 옛 여인으로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백정이 됐다. 연산군이 단희에게 마음을 품자 임숭재는 갈등하게 된다. 왕과 간신과 여자의 삼각관계는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주다가 뜻밖의 반전을 준비한다.
연산군의 파격적인 캐릭터를 열정적으로 해낸 김강우와 희대의 간신을 실감나게 표현한 주지훈의 연기가 돋보였다. 2014년 ‘인간중독’으로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임지연은 단희 역을 맡아 지적이면서도 요염한 이미지를 뽐냈다. 궁궐 정원의 물 위에서 추는 궁중무와 검무가 현란하다. 1만 명의 궁녀를 간택하는 과정도 볼거리를 제공한다.
‘간신’은 ‘왕의 남자’와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팩션의 재미를 추구했다. 민 감독은 “왕의 시점이 아니라 간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의 의도는 어느 정도 적중했다. 하지만 청소년관람불가를 감수하면서까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굳이 넣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러닝타임 131분도 좀 지루하다.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왕과 간흉, 그리고 여인들… ‘팩션’ 흥행은?
입력 2015-05-13 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