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봉건시대 기관이나 건물이 국가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인증’을 받는 방법은 국왕이 이름을 지어 내려 보내는 ‘작명하사(作名下賜)’였다. 나라에서 내린 ‘사액현판(賜額懸板)’이 걸린 건물은 존경 대상이었다. 이런 작명하사가 아펜젤러의 남자학교에 내려왔다. 1887년 2월 국왕의 명으로 배재학당이란 교명을 지어 내려 보낸 것이다. 작명하사는 아펜젤러의 남학교에만 내려온 게 아니었다. 스크랜턴 모자의 여학교와 병원에도 내려왔다. 시기로 보면 아펜젤러보다 메리 스크랜턴의 여학교가 먼저 이름을 하사받았다.
국왕이 하사한 이름, 이화학당
메리 스크랜턴은 자기 어학교사(통역)인 외부 직원을 통해 고위관리들이 정동 언덕에 우뚝 솟은 ‘대감 집보다 더 큰 집’을 보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접했다. 그래서 1887년 1월, 메리 스크랜턴의 정동 집에서 외부 고위관리 초청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엔 외부 독판(장관) 외에 협판(차관) 3명이 참석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미국 해외여선교회 지회 한 곳에서 보내 준 환등기로 미국과 유럽의 정치, 그리고 성경 내용을 보여주었다. 스크랜턴은 편지에서 “이 그림들로 인해 우리를 불안하게 하던 것이 사라지는 듯싶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호기심이 아주 많아 그림을 보고는 몇 번씩 보고 또 보려 합니다”라고 썼다.
만찬 자리에서 메리 스크랜턴은 여학교에 대한 주변의 오해와 잘못된 풍설들에 대해 해명하면서 정부 지원을 요청했다. 독판을 비롯한 관리들은 협력을 약속했다. 마침 그 모임에 참석했던 아펜젤러도 독판에게 남학교의 학교명 문제를 거론하며 협력을 부탁했다.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몇 주 후 여학교 이름이 하사됐다. 뜻은 ‘배꽃 학교 터’였으며 ‘기수’라는 호위 무사도 보냈다. 기수는 일반 병사보다 약간 높은 계급으로 외교사절을 보호하기 위해 선발된 병사였다.
이렇게 해서 ‘이화학당’이란 교명이 탄생했다. 꽃 이름을 학교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서양인에게는 약간 유치한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동양에서는 달랐다. 특히 배꽃(梨花)은 조선시대 왕족(전주 이씨)을 상징하는 ‘오얏꽃(李花)’과 모양이 같아 흔히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곤 했다. 그 결과 사액현판을 내건 직후인 1887년 여름에는 학생수가 11명으로 늘었고 4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교무실까지 완성한 그해 말에는 학생 18명이 기숙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메리 스크랜턴은 1887년 3월 21일자 편지에서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여학생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학생들은 해외여선교회 회원들이 보내오는 후원비로 양육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뉴잉글랜드지부에서 후원하는 학생 3명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꽃님이’ ‘음전이’ ‘간난이’였다.
꽃님이는 앞서 설명했던 스크랜턴이 얻은 첫 영구 학생으로, 어머니에게 외국에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며 서약서까지 써주고 받았던 학생이었다. 처음엔 대책 없는 학생이었으나 1년 만에 통역을 돕는 유능한 학생이 됐다. 12세 음전이는 고아였지만 놀라운 학업 성취도를 보여줬다. 스크랜턴의 며느리 루이자는 “미국 학생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했다. 간난이는 윌리엄 스크랜턴 박사가 병원 건물을 짓고 처음 받아들인 환자의 딸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의 일관된 소망은 한국인에게 ‘보다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한국 여성들의 격리된 생활공간인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내륙, 즉 선교사들에겐 아직 여행 허가가 나지 않은 지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지방에는 이미 개종한 여성들이 많았다. 성경과 발췌본이 보급되면서 진리를 깨달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세례 받은 토착 여성을 ‘안방과 지방’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해외여선교회 이념을 발전시켜 ‘토착 여성이 토착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여성선교 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과 지도력을 갖춘 전도부인이 필요했다.
민중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의 병원에도 이름이 내려왔다. ‘시병원(施病院)’이었다. 그는 영어로 ‘Universal Hospital’이라고 번역했다. 온갖 은덕을 널리 베풀어 환자를 치료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먹이고 입히라는 고종황제와 한국 정부, 백성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당시 스크랜턴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시란돈(施蘭敦)’이라 했기 때문에 시병원은 ‘시란돈병원’을 줄여 부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1887년 10월, 여성 선교사 두 명이 도착했다. 의료를 담당할 하워드 선교사와 교육 담당 로드와일러 선교사였다. 로드와일러는 이화학당에 투입됐고 하워드는 시병원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1888년 10월 이화학당 아래쪽에 별도 한옥 건물을 구입, 수리를 거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한국 최초 여성 전용병원을 설립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시병원을 중심으로 ‘민중 선교’를 추진했다. 그리고 극빈자와 버림받은 자를 대상으로 한 병원 사업으로 정착시켰다. 말 그대로 민중 병원이었다. 그는 의술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전도에도 힘을 써, 병원 안에 전도지와 전도인을 항시 배치해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면서 복음을 접하도록 했다.
당시 병원은 시병원이란 사액현판까지 받으면서 안정적 선교를 구가했다. 하지만 스크랜턴은 국왕의 환심이 아니라 민중의 관심을 얻기를 원했다. 그는 상류층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원했다. 그래서 상류층 주거지역인 정동에서 벗어나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으로 들어가 돕고 싶었다. 그는 이런 곳에 우선 ‘시약소(dispenary)’를 차려 응급환자를 치료하면서 매서인이나 전도부인을 상주시켜 교회 설립의 기초로 삼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서울 변두리에 세워질 의료기관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 칭했다. 미국 선교부도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구체적 실현은 1년 뒤로 연기됐다. 1888년 봄부터 예상치 못한 악재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6) 정동 선교부 안정과 사역 확장
입력 2015-05-12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