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와 주가 폭락, 해골, 해파리의 역습이 미술 소재로 등장했다. 심지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전시장 안에서 읽기까지 한다.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는 ‘정치적 미술 폭탄’이 투하된 듯했다.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정치학을 전공한 오쿠이 엔위저(52) 전시감독의 성향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 폐해를 환경, 노동, 여성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풀어낸 각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집합시켰다. 정치적 서사가 강하다 보니 형식에서는 영상이나 설치, 퍼포먼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9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프리뷰(6∼8일)를 통해 둘러봤다.
마르크스의 귀환?
엔위저 감독이 내건 전시 주제는 ‘모든 세계의 미래’다. 엔위저는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 창설 이래 정치·사회·기술·경제의 격변과 함께해 왔고 그 과정에 노동·여성·반식민지·인권 운동 등이 있었다”며 “전시 주제는 그런 변화의 현주소를 재평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표현한 작품은 영국 작가 줄리언 아이작의 ‘다스 캐피털 오라토리오’다. 전시장 안에서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을 읽는 퍼포먼스다. 일부 작가들은 레닌, 마르크스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그려 넣거나, ‘캐피털(자본)’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 초청작가 김아영, 임흥순, 남화연의 작품이 석유자본, 17세기의 튤립 투기, 노동자의 인권문제 등을 다룬 것도 자본주의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 사진 거장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도쿄 주식시장’ ‘시카고 상품거래소’ 등도 초대됐다. 아르헨티나의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시위 드로잉’에서 각국의 시위 장면을 담았는데, ‘오바마 퇴진’이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환경문제도 집중 거론된 주제다. 대지 미술가 로버트 스미슨의 유명한 ‘죽은 나무’가 재현돼 전시장 안에 들어왔다. 인류의 바다생물 사냥을 고발하는 영상도 있다. 버려진 상자 등의 폐기물이나 폐타이어를 이용한 설치 작품은 환경파괴를 돌아보게 한다. 흑인 작곡가 줄리어스 이스트만의 피아노 작품 ‘악의 니그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도 나왔다.
퍼포먼스와 영상이 압도하다
이용우 베니스비엔날레 심사위원은 “올해는 퍼포먼스가 전에 비해 많아졌다. 50여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퍼포먼스를 해 ‘퍼포먼스의 개척자’로 불리는 미국의 조안 조나스가 미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것도 의미가 크다. 79세의 노작가가 이번에 내놓은 ‘그들은 말없이 우리에게 온다’는 본인과 아이들의 퍼포먼스 영상이다. 유령처럼 흰옷을 입은 이들의 행위는 꿀벌, 코뿔소 등 자연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오버랩돼 자연 파괴에 대해 경고한다.
전시장에서 연기자가 진흙을 이겨 벽돌을 제작하게 하는 티라바지나의 또 다른 작품도 있다.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는 자크 라캉의 심리분석서를 재해석해 책을 만들고, 이를 한 사람이 읽고 한 사람이 동작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서사를 강조하면서 이를 풀어내기에 적합한 영상작업이 많다.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상연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을 보여 1시간이 넘는 작품들도 많았다. 이런 추세라면 베니스영화제와 합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각국 국가관도 감독의 지향성 고려돼
엔위저 전시감독이 관장하는 국제전과 달리 국가관은 개별 국가의 의도대로 꾸미지만 감독의 지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관은 ‘나무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소나무를 붉은 흙덩어리째 전시장 안팎에 설치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기술을 접목해 조금씩 움직이도록 돼 있다. 작가 셀레스트 부르지에 무즈노는 “자연(nature)과 양육(nurture)이 동시에 내재된 새로운 자연 상태를 제시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영국관은 사람 형태를 한 고무인형 설치작품 등을 통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희화화했다.
일본관의 ‘손의 쥔 열쇠’는 배 두 척 위로 지붕처럼 무수히 붉은 실이 얽혀 있고 그 실 끝에 열쇠가 매달려 있다. 배는 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손이 열쇠를 보듬고 있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열쇠는 전 세계인으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수집했다. 붉은색이 일장기의 붉은색으로 국가주의적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스페인관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오마주한 동시대 작가 3명의 작품이 전시됐다.
베니스비엔날레에 국가관이 생긴 것은 출범 12년 후인 1907년 벨기에관이 처음이다. 현재 상설 국가관 30개 중 리모델링 허가를 받은 곳은 호주관이 유일하다. 대규모 기부 덕분에 이뤄졌으며 큐브형의 블랙 건물에서는 피오나 홀의 환경고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군복을 자른 뒤 실처럼 꼬아서 만든 해골 모양의 설치 작품이 강렬하다.
베니스=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전시장에서 ‘자본론’을 읽다… 베니스비엔날레, 강렬해진 정치적 서사
입력 2015-05-11 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