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 귀엽죠? 선글라스가 너∼무 잘 어울리시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서울 동대문구 밥퍼나눔운동본부(밥퍼) 식당은 오전부터 떠들썩했다. 할머니 한 분을 모셔놓고 밥퍼 관계자들이 얘기꽃을 피웠다. 할머니는 말을 잘 못했다. 그래도 연신 웃었다. 기자가 인사를 하자 얼른 두 손을 잡고 웃었다. 밥퍼에서는 ‘스마일’ 할머니로 통한다. 할머니는 잠시 후 품에서 카드 같은 것을 꺼내보였다. 주민등록증이었다.
할머니는 왜 주민등록증을 꺼내보였을까. 지난달 20일, 할머니는 밥퍼 식당에서 근사한 생일잔치를 치렀다. 그것도 생애 첫 잔치였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생일 떡이나 케이크 커팅이 아니었다. 주민등록증 공개였다. 생일을 맞은 할머니는 자신의 사진이 들어간 주민등록증을 들고 연신 기뻐했다.
할머니는 이날 분홍치마에 흰 저고리를 차려입고 꽃문양 족두리까지 썼다. 생애 첫 한복이었다. 식당 한쪽에는 이날 생일잔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말해주듯 플래카드 하나가 걸려 있었다. ‘생애 첫 생신(74)’. 74년 동안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 주소도 없이 무연고로 살아온 우리시대 민초(民草) 중 민초, 이종순 할머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었다.
잘 웃는다고 붙여진 이름, ‘스마일’
연고 없이 전국을 떠돌며 살아온 할머니는 기초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길이 없어 10여년 전부터 ‘밥퍼’에서 식사를 해왔다. 스마일 할머니는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노숙인 식구들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2013년 9월,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가 ‘최연선’이란 이름을 새로 지어줬다.
밥퍼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청소년 시기에 전남 목포에서 상경한 후 줄곧 떠돌이 노숙인으로 살았다. 부모가 호적 등록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할머니는 인지능력이 낮았다. 자신의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두세 단어의 나열이 전부였다. 밥퍼에서 점심 식사를 했고, 소일거리로 파지를 수집하거나 동네 마실 나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할머니의 ‘과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다. 밥퍼 가족들에 의해서였다. 그해 11월쯤, 할머니는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많아졌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했다. 그날도 다리 통증을 호소하던 할머니는 밥퍼 주방장 김미경씨를 붙잡고 “아파, 아파” 했다. 평소 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던 김 주방장은 그 길로 할머니를 데리고 다일천사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했는데 할머니는 전혀 몰랐다. 이 때문에 접수가 불가능했다. 병원장도 할머니 사정은 딱하지만 의료법상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료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픈 다리의 치료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일공동체는 대신, 이번 기회에 할머니의 존재를 갖게 해주고 싶었다. 직원들은 할머니 신원 확인을 위해 관할 경찰서인 동대문경찰서 생활질서계로 지문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동대문구청으로부터 노숙인 의료1종 전자번호를 발급받았다. 할머니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속히 진행하기 위해 법적으로 치료가 가능한 행정절차를 만든 것이다.
그 즈음 할머니의 통증은 가슴 쪽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아파, 여기” 했다. 밥퍼에서는 다시 할머니를 인근 동부시립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았다. 진단 결과 갈비뼈 1대가 부러졌으며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한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사는 할머니의 갈비뼈는 오래전에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할머니는 앞서 2013년 9월, 길을 가다가 대형트럭과 접촉사고가 났다. 당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일공동체 측은 지난해 1월 동대문구청으로부터 이 할머니의 이름과 주민번호 기록을 확인한 공문 한 통을 받았다. 할머니의 ‘존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였다. 공문은 동대문경찰서가 작성한 내용이었다. 2013년 9월 트럭과의 교통사고 이전인 5월, 할머니는 또 한 번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때 경찰이 응급조치를 하면서 할머니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확인했다. 당시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이종순이라는 것과 생일이 3월 2일이라는 것을 말했고 경찰은 이를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다일공동체 장갑순 과장은 “할머니가 애초 기억이 없었기에 자신이 말한 이름과 생년월일이 틀릴 수도 있지만 이를 토대로 할머니에 대한 주민등록을 정식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족은 나의 힘, 나의 희망
다일공동체는 이를 위해 지난해 4월 25일, 이 할머니의 병원진단서를 비롯해 성장과정증명서 등 총 12가지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지난 1월 말 가족관계등록 성본창설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고 2월엔 법원 판결문을 토대로 동대문구 전농1동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증을 신청했다.
이 할머니는 지난 3월 27일 전농동 동사무소에서 지문을 입력했고 마침내 지난달 20일, 등기우편으로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주민등록증에는 이름과 주민번호가 선명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았던 74년 세월을 뒤로 하고 할머니는 마침내 자기 존재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다일작은천국 임정순 원장은 “할머니와 우리는 완전히 한가족이 됐다”며 “밥퍼에 오는 누구나 가족이며 가족은 희망”이라고 말했다. 치매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할머니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아픈 할머니를 모시고 수십 차례 병원을 다녔던 밥퍼 주방장 김미경씨는 “할머니는 요즘 말씀도 곧잘 하신다”며 “할머니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보고 싶어, 보고 싶어”라고 했다.
다일공동체는 이 할머니에 대해 기초생활수급, 의료보호1종 대상자로 신청한 상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이 되면 밥퍼에서 전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또 할머니를 위해 방을 얻어 생활까지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할머니는 현재 노숙인 쉼터인 ‘다일작은천국’에 살고 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가족행전] 스마일 할머니 74년 만에 이름을 갖다
입력 2015-05-09 01:51 수정 2015-05-09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