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대통령의 말발

입력 2015-05-08 00:10

1968년 2월 29일 밤 10시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에서 ‘석유류 세법 개정안’ 처리가 지연되자 이효상 국회의장과 공화당 김종필 의장, 김진만 원내총무 등을 급하게 불러들였다. 휘발유 관련 세금을 100% 인상해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에 충당할 계획이었으나 신민당이 극력 반대하며 법안 처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의장이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야당이 농성을 하고 있어 오늘, 이번 임시국회 회기 중에는 통과가 어렵다”고 보고했다. 순간 박 대통령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이 나라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도로 하나 만들겠다는데 야당이 반대한다고 여당이 그걸 하나 통과 못 시켜? 무슨 이런 일이 있어!” 그러고는 김 의장 쪽으로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참석자들은 혼비백산했고, 국회에 돌아가자마자 여당 의원들을 모아 자정 직전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이만섭,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

그 시절 대통령은 무소불위였다. 집권당 총재로서 국회의원 공천과 국회의장단 인선을 마음대로 했으니 당과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대국회 권한은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을 거치면서 급격히 약화됐다. 지시가 요청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국회를 뒤흔들었다. 여야의 공무원연금법 개정 합의안을 비판하자 새누리당 지도부가 합의를 번복했고, 결국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 당청 간 혼선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말발은 어느 정도 먹힌 셈이다. 이와는 달리 박 대통령이 국회의 경제 관련 법안 처리 지연에 대해 “이게 국민을 위한 정치냐”고 연일 비판하지만 야당이 오불관언이다.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닐까. 시급한 과제라면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를 직접 만나 정중하게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야당까지 움직일 순 없다. 엄혹한 시절 아버지 박 대통령도 못한 일이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