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교회 은승자(72) 권사가 눈물 글썽이며 옛 얘기를 했다.
은 권사는 열여섯 살부터 예수를 믿었다. 고부 양조장집 딸이었다. 어린 승자는 찬양을 참 잘했다. 그 아버지는 부흥회 간 승자를 경북 김천에서 '잡아' 왔다. 기도원 원장이 "이 아이가 당신네 가정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아버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버지는 승자를 일주일 간 집에 감금했다. 그래도 승자가 뜻을 굽히지 않자 작두를 가져다 놓고 딸을 말렸다.
"궁글러서라도(굴러서라도) 간당게요."
딸의 그 단호함에 아버지가 무너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래 다니거라…."
은 권사의 형제자매 6남매는 그렇게 교회를 다니게 됐다. 작두를 들었던 아버지는 말년 고부교회를 다녔고, 성경을 몇 번씩 읽었다.
조병갑 전봉준 정희수 은명기 이중표
고부교회. 1894년 동학농민혁명 발생지 고부읍성에 있다. 그해 음력 1월 전봉준 휘하 농민군은 고부봉기로 고부읍성을 접수했다. 음력 4월 전주성 봉기, 음력 9월 전주·광주 궐기가 있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적 외피를 입었으나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운동이었다.
혁명은 실패했다. 일본과 청나라를 끌어들인 조정은 농민군을 섬멸했다. 헤롯의 학살과 같았다. 반란의 성읍 고부는 사실상 폐군됐다. 그리고 1914년 당시 정읍군에 편입돼 면으로 남게 됐다.
고부읍성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24년이다. 화인(火印)이 찍힌 갈릴리 나사렛과 같은 마을에 복음조차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복음의 경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구전 등을 종합하면 고 은명기(1921∼1996) 목사의 모친 강효순 여사의 집 등에서 예배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예배는 이근택 전도사를 모시고 1927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듬해 정희수 조사가 지금 교회 자리에 예배당을 신축했다. ‘은 감찰’(은세창)로 불리던 은 목사의 할아버지가 드러나지 않게 재정적 지원을 했다. 은 감찰은 지역 유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부교회 기반을 다진 정희수 목사는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평양 숭실학교, 평양신학교 등을 다녔다. 일제강점기 고부읍교회(고부교회 전신) 등 전북 서부지역 순회 목회 등을 통해 구령에 힘썼다. 은명기 목사는 1972년 유신반대 투옥, 1980년 5·18광주항쟁 수습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공의의 목소리를 높였던 재야원로였다.
조손· 한 부모 가정 돌보는 교회
고부교회는 오늘도 그 ‘저항의 땅’에서 아이들과 늙은 부모 세대를 섬기고 있다. 농촌교회가 그렇듯 젊은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그들은 1980년대까지 ‘고부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부는 시각에 따라 반역의 땅이었고, 저항의 땅이었기에 그들은 늘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지난 4일. 이 교회 노시점(54) 목사와 백덕자(57) 사모는 재량휴일로 등교하지 않는 고부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빴다. 이 아동센터는 2006년부터 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25명의 아이들은 “목사님, 목사님”하며 응석을 부렸다.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아이들 셋에 하나는 조손·한부모·다문화 가정이다. 자녀가 없는 노 목사 부부는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고 있다.
노 목사는 “아이들이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이 많으나 현실은 그만큼의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없어 욕구불만에 차 있다”며 “더구나 가정적인 문제 등으로 공격성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며 상처를 드러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 노 목사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전봉준 생가’ 등을 둘러봤다. 다음 날이 ‘어린이 날’이라 아이들은 정읍시내에 나가 피자 먹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하죠. 만약 교회마저 없었다면 이 아이들의 정서를 누가 어루만질 수 있을까요. 사랑받기 원하는 아이들입니다. 하나님 인격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높일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교회라는 울타리는 넓은 의미의 집입니다.”
부부에게 섬김의 대상은 또 있다. 30여명이 채 되지 않는 교인들이다. 고부의 모교회로 한때 100여명이 출석했으나 지금은 70대 이상 나이든 교인만 남았다. 사모가 아프기라도 하면 반주자조차 없다. 1978년 헌당된 예배당은 마루가 뒤틀려 튀어 오르고 비가 새도 긴급 손질 외에 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총회 지원으로 간신히 유지가 되고 있는 미자립교회다.
‘별세신학’ 이중표 목사 첫 목회지
그럼에도 보혜사 성령은 ‘궁글은’ 자들에게 있다. 웅크린 이들에게 예수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별세신학’의 거장 이중표(2005년 작고·전 서울 한신교회) 목사가 이 낮고 작은 교회에 부임했다(1967∼70년). 이 목사의 첫 목회지였고 전도사 신분이었다. 그때도 전도가 쉽지 않았다. 정읍은 우상숭배와 이단종파가 강세를 보인 지역이었기에 교회가 핍박 속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
이 전도사는 고부를 쉼 없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시장으로 가 한 할머니를 붙들고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젊은 전도사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 왈칵 울음을 쏟았다. 작은 예수의 서러운 눈물이었다. 훗날 이중표 목사는 간증을 통해 “내가 막 우니까 그 할머니가 딱해 보였든지 고부장터 전도 1호 성도님이 되셨다”라고 간증했다. 할머니가 ‘교회 나가주는 선심’을 쓴 것이다.
은승자 권사는 이중표 목사를 기억했다.
“이 목사님은 정말 영혼이 맑으신 분이었어요. 시골교회 목회자로 훌륭하신 분이었죠. 농사철이 되면 나서서 논, 밭에서 모도 심고, 풀도 매셨어요. 그렇게 해서 곡식이라도 생기면 이웃 이평교회(이평면) 식구들 먹을 것으로 주시고 그곳에서 순회 설교하시곤 했어요. 또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그 집에 먹을 것이 없는 줄 금방 아세요. 안 믿는 사람이 굶는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웃이 굶는 것은 내 책임이다’며 당신 밥숟갈을 줄여 도우셨어요.”
60∼70년대 고부교회는 활발했다. 100여명이 넘는 출석 교인으로 예배당이 꽉 찼다. 은 권사를 주축으로 한 성가대는 호남 명산으로 불리는 두승산에 올라 성가 연습을 해 ‘정읍시찰회 성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고부교회는 은명기를 비롯해 은형규 은희용 안종수 김용성 남성수 목사 등 많은 장로교 목회자를 배출했다.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 같은 인물들이 공의를 실천했다. 그러나 그 공의는 고부읍성의 쇠락만큼이나 쓸쓸하다. 많은 이들이 빛도 없이 세상 속에서 멸실되고 잊혀져 간다. 세상적 기준으로 초라하고 외로운 삶이었다.
이 세상에서의 힘없음은 무수한 신앙의 흔적을 잃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교회 당회록 등이 남아 있지 않고, 6·25한국전쟁 당시 교회의 움직임 등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도행전’을 돌에 새겨 후대에 전달하지 못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짜고 쓴 간수가 되고 만다.
“이웃이 굶는 것은 목사인 내 책임이다”
그래서일까. 한때 전주 다음 갔던 풍요의 고부읍성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다. 성읍 영화의 상징 연정(蓮亭) 군자정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군자정은 수령 조병갑이 백성의 고혈을 짜 축재하고, 그 재물로 기생 끼고 풍악을 울리던 곳이다.
718m에 이르렀다는 고부읍성 또한 흔적도 없다. 금학루, 민락정 등 문헌에 남아 있는 건축물의 터조차 알기 쉽지 않다. 다만 향교가 동헌 자리였던 현 고부초등학교 왼쪽에 남아 있어 고부가 옛 성읍임을 증명한다. 일제가 동헌이나 객사를 보통학교로 사용했고 향청(鄕廳), 사령청(使令廳) 등 읍성 부속 건물은 우체국, 조합 건물 등으로 썼던 통례를 감안한다면 고부의 영화는 1892년 수령 조병갑 부임 전과 후로 나뉠 듯하다. 한 사람의 탐욕으로 고부는 이렇게 수대에 걸쳐 땅과 사람이 피폐한 고장으로 남게 됐다.
고부교회는 향교 명륜당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명륜당 앞에서 동쪽으로 눈을 들면 객사와 동헌 자리에 고부초등학교 교사(校舍)가 있고, 운동장 너머 아담한 흰색 예배당이 그림처럼 들어온다.
지금 호남평야 곡창지대로 풍요했던 옛 고을 고부는 잠들어 있다. 그러나 91년 전통의 고부지역 모교회 고부교회는 깨어 있다. 그 행색이 비록 예수의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 같을지라도 그 누구도 남루하다고 말하지 못할 만큼 성스럽다. “궁글러서라도…” 교회에 나간다는 은 권사, 아내 김공시(작고) 권사를 10년간 병 수발 했던 김영국(71) 안수집사도 예수의 축복과 은총에 힘입어 여전히 교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했으나 핍박’(딤후 3:12)받은 이들의 후손이다.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막 10:29) 자가 되기를 원했던 이들의 후손이다.
2015년 5월. 성읍 향교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같은 시각. 고부교회 예배당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공의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들림은 육신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부를 거쳐 가려던 노시점 목사, 주저앉은 까닭은
노시점 목사는 2005년 부임했다. 거쳐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길가에서 놀고 있는 애들에게 교회에서 밥을 해줬어요. 너무나 허겁지겁 먹어요. 그때만 해도 IMF 외환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아 굶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조손, 한부모 가정 애들이 많았고요. ‘할머니, 교회 갔더니 밥도 줘’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쿵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주저앉은 이유다.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됐다. 기계공고를 나와 엔지니어가 된 아이도 있다. 이날 고사부리성을 안내하던 길에 만난 죽순 캐던 동네 아주머니가 노 목사에게 하소연했다. “목사님, 우리 아들 돌아오게 좀 해주세요”라며 말이다. 비뚤어진 아들은 ‘탕자’처럼 집을 나갔다. 노 목사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 중이다.
“올바로 자란다는 건 공부 잘해 출세하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가 말씀대로 살아 축복 받는 가정을 이루는 일입니다. 축복은 세상 말로 행복입니다. 교회는 행복을 주는 곳입니다. 예수가 그랬듯이요.”(고부교회 063-536-0129).
정읍=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