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는 불명예에 대하여 그리고 그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오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기록하기로 한다.’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1927∼2015·사진)는 1999년 장편 ‘양철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나치 점령에서 2차 대전 종전 후에 이르기까지 독일 사회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다. 그래서 ‘양심적 지식인’ 평가를 받았던 그가 2006년, 고교시절 징집돼 나치 친위대 복무한 사실을 고백했을 때 세상은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민음사)에서였다.
‘회상은 누군가가 벗겨주기를 원하는 양파와도 같다’고 말하는 노년의 작가는 매운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흐려지는 눈을 비벼 가며 고통스럽게 과거와 마주했다. 당시 행위가 ‘영웅들을 경배’하고 ‘제복에 유혹 당했던’ 청소년기의 치기가 작용했다고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때 왜 몰랐던가, 왜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았던가’라고 집요하게 자문한다.
어느 날 친구가 사라진 이유도 그의 아버지가 게슈타포에 체포된 것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 역시 그에게는 고통스런 회상일 뿐이다. “내 기억의 나뭇잎을 열심히 헤집어 보아도 유리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태도는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목소리로 분출되어야 할 현안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로 치부하며 점점 개인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전반부가 단치히(현재 폴란드 그다니스크)의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그라스가 전쟁을 직접 보고 겪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깨닫고 작가로 주목받기까지를 다룬다. 대학생이 된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조각과 소조)을 배우고 운명의 사랑(첫 아내인 안나 슈바르츠)을 만난다. 그 때부터 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안나와 결혼하면서 장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올리베티 휴대용 타자기는 글쓰기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 타자기로 지은 시가 라디오 방송국 시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등단했다.
그라스는 32세 때인 1955년 ‘47그룹 모임’에 참석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다.
자서전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외상값 수금에 나섰던 이야기, 불안했던 여동생의 미래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회한 등 개인사가 스며들어 있어 작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희창, 안장혁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양파 껍질을 벗기며] “나치 복무”… 老작가는 왜 고통스런 고백을 택했나
입력 2015-05-08 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