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성 옌볜(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용정)시 명동촌. 지난달 22일 방문한 이곳의 정경은 한적한 시골 마을 그 자체였다. 명동촌은 130여 곳의 항일유적지가 몰려 있는 지린성에서도 항일운동유적 답사의 거점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하지만 황량한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떼, 잡초가 무성한 폐가, 인적 드문 산촌 마을의 모습에서 신앙·민족교육의 중심지이자 항일투쟁 발원지였던 역사의 흔적을 읽어내긴 쉽지 않았다.
명동촌 초입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생가에 도착했다. 깨끗하게 새로 지은 건물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단장한 생가와 명동학교였다. 생가 입구에는 한글과 중국어로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었다.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한 문구가 불편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갖게 했다. 이곳 생가를 자치주 중점 문화재보호단위로 2007년 공포했다는 내용을 빨간 글씨로 새겨 넣은 비석도 놓여 있었다.
◇명동촌 신앙·항일정신의 산실, 명동교회=윤동주는 1917년 명동학교 교사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한학자인 김약연(1868∼1942) 선생의 여동생 김용 슬하에서 태어났다. 명동교회 장로였던 조부 윤하현 등 가족 모두가 크리스천이었기에 윤동주 역시 신앙 속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15세까지 명동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명동교회를 다니며 신앙과 항일정신을 함양했다.
그와 가족들이 출석한 명동교회는 1909년 중국 간도지역 최초로 세워진 교회다. 창립 첫해에는 8칸 규모의 한옥이었지만 1년 뒤 김약연 등 마을 주민의 주도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 교회 건물은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옥 지붕 옆 높이 매달린 십자가를 지나 교회 입구로 들어가자 명동촌 개척사와 주요 인물들을 소개한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십자가가 그려진 강대상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교회는 쇠락했지만 윤동주 생가와 명동학교는 현대식 공원처럼 단장됐다. 시 정부가 최근 설치한 윤동주의 시비, 정자, 벤치 등은 한적한 마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까지 줬다.
취재에 동행한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는 “명동교회는 아무래도 종교시설이라 다른 건물에 비해 관리가 덜 된 것 같다”며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계속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간도 대통령’ 김약연=명동촌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김약연을 빼놓을 수 없다. 1868년 함북 회령에서 출생한 김약연은 8세 때부터 10여년간 한학을 공부해 유학(儒學)에 통달했다. 구한말 일제의 횡포로 국세가 기우는 것을 통탄했던 그는 1899년 가족과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장재촌에 정착했다. 1901년 김약연은 자신의 호를 딴 서당 ‘규암재’를 지어 한학을 가르쳤다. 교육으로 힘을 길러야 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신념 덕에 그는 한학자임에도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1908년 규암재와 지역 서당을 통합해 서전서숙을 계승한 신식교육기관 명동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 1906년 룽징에 세운 학교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07년 폐교됐다.
김약연은 설립 1년 만에 규모를 키워 학교 이름을 ‘명동학교’로 고치고 초대 교장에 부임했다. 우수한 교사를 학교로 데려오는 데 열심이었던 김약연은 신민회 회원이자 서울기독교청년학관 출신 교사 정재면을 초빙하기 위해 그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 조건은 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고 온 마을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명동학교는 간도 지역 최초로 여성학부를 설치해 여성계몽에도 앞장섰다. 신식교육을 바탕으로 애국심 고취와 신앙교육에 힘을 쏟은 결과 학교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졌다. 인근 지역은 물론 한반도와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김약연은 1913년 한인동포 공식 자치기구인 ‘간민회’를 세웠다. 1919년에는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인 ‘3·13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명실상부한 북간도의 항일운동 지도자가 된다.
안병렬 옌볜과기대 한국어과 교수는 “김약연 선생은 항일운동과 교육사업, 동포 권익사업에 앞장서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다”며 “윤동주 시인에게 신앙과 민족혼을 불어넣은 김약연 선생을 더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약연은 1929년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 수학한 뒤 1930년부터 명동교회 목사, 은진학교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42년 룽징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기념비는 현재 윤동주 생가 입구 근처 빛바랜 비각 아래 세워져 있다. 아쉽게도 문화혁명 때 일부 파손돼 가까이 들여다봐야 비문을 판독할 수 있다.
◇명동촌 인물들, 민족사의 빛이 되다=명동학교는 1925년 폐교될 때까지 졸업생 1000여명을 배출했다. 졸업생 가운데는 다방면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선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명동학교 졸업생의 기록은 지린성 룽징시의 대성중학교 옛터에 세워진 용정중학교 역사기념관에서 찾을 수 있다. 용정중학교는 1946년 대성 은진 영신 동흥 등 6개 학교를 통합해 세워진 학교다. 기념관은 이들 학교가 배출한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형인 독립운동가 송몽규, 문익환 목사, 영화배우 나운규 등을 모두 ‘용정의 인물’로 소개했다.
일제 강점기 북간도에서 활약하던 수많은 크리스천 독립운동가들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신앙에 의지하며 독립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본 군경의 박해와 살해 위협, 가난과 굶주림, 질병에 시달리며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안타깝게도 윤동주와 송몽규 등 많은 이들이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뜨거운 신앙과 헌신적인 항일운동은 한국교회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룽징=글·사진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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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07 0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