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해밀턴 한의대를 살리기 위해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하마터면 건물주에게 사기당해 날릴 뻔한 돈이었다. 2004년 2월, 나는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학교 이름도 ‘뉴질랜드 한의과대’로 새롭게 변경했다. 감사한 건 교수님들이 다시 학교를 시작해 보자는 열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제가 발생한 학교를 새롭게 운영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뉴질랜드 교육국에서 이례적으로 단시간 내에 학교 인사를 정식 승인해줬고, 모든 게 원활하게 진행됐다. 솔직히 그때는 내가 열정을 갖고 학교를 경영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젊은 나이에 한방화장품 사업을 하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꽉 차 있었다.
학부형들에겐 수업료를 뉴질랜드 교육법인 통장으로 꼭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투명하게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 우리 학교가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도록 중국 허난성에 있는 하남중의대와 MOU도 맺어 공동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06년부터 20여명의 중국 학생들이 뉴질랜드에 와서 공부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교환학생 방식으로 학생 교류도 시작했다. 또 한국에 한약학과나 피부미용과가 있는 대학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유학생 모집에도 나섰다. 2005년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좀처럼 학생들은 모이지 않았고 재정 상태는 날로 악화됐다. 결국 찾아간 곳이 뉴질랜드의 한 교회였다. 교민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홍보하려는 마음에 해밀턴순복음교회를 처음 찾아갔다. 2006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수요 예배를 마치고 담임 목사님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교회 밖에서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 이어졌다. 참다못해 슬그머니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만에 다시 교회 문턱을 밟아보는 것인가. 감회가 새로웠다.
어찌된 일인지 강대상 중앙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말았다. 기도하고 싶었고,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학교 홍보를 해야 하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며 계속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세워둔 차 안에서 울었다.
이후로 교회 건물이나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났다. 무엇인가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불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빨리 돌아오라”는 강권적인 사인이었다. 그럼에도 왜 계속 그것을 거부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비로소 그 불안함과 마주했다.
2006년 3월, 뉴질랜드에서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유일한 침구학교인 우리 대학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의료봉사를 계획했다. 해밀턴을 시작으로 로토루아, 오클랜드 등 3개 도시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10여명의 한의사들을 초청해 열기로 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입국한 한의사들에게 밤새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선생님 한 분과 그의 사위만 남겨놓고 모두들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분들과 우리 학교 학생들 그리고 나까지,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의료 봉사를 펼쳤다. 그리고 7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뉴질랜드 교육국에서 긴급 감사를 하겠다고 통보가 마침 도착했다. 잠시 학교를 비운 새 나에 대한 투서가 교육국을 비롯한 이민성, 노동부에 들어간 것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현숙 (6) “폐교 위기 해밀턴 한의대 살리자” 15만 달러 기부
입력 2015-05-06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