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이 시를 처음 본 것도,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란 이름을 안 것도 중학교 때 다녔던 동네 이발소에서였다. 벽에 걸린 그림에 쓰여 있었다. 하루는 멍하니 시를 읽던 나에게 주인아저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눔아, 힘들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지금 세태라면 ‘웬 개콘, 너나 잘하세요’라고 반응하겠지만, ‘고마운 아저씨’였다는 기억이 난다. 뭐 1970년대 어리숙한 시절이었으니까.
살면서 사람이나 단체, 시스템, 법이나 규칙 같은 것으로부터 속았다는 느낌(물론 반쯤은 오해이거나 내가 빌미를 줬을 것이다)이 들었을 때, 이 구절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면 혼자 피식 웃곤 했다.
지난 주말에도 그랬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보고서다. 여야 대표들은 330조원 절감만 내세우며 ‘국민 대합의’ ‘사회적 대타협’ 같은 추상적 단어로 자화자찬했다. 게다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까지 슬쩍 올렸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지,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는 남의 일이다. 찔끔 개혁으로 공무원연금 적자가 계속된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우리 아이들한테 엄청난 부담을 계속 미루는데도 말이다. 내년 선거에서는 앞뒤 다 자르고 큰 업적을 남겼다고 서로 주장할 것이다. 절묘한 정치이익 카르텔이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책임 지지 않아도 된다. 현직이 끝난 후에나 발생할 일이니까. 결과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짓이다. 무책임은 대개 무능력 또는 비겁함과 한 쌍으로 다닌다. 책임 없이 질러대거나 결정을 회피하니 무능력하고, 이를 수습하자니 비겁하게도 방향을 틀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우리 정치가 때때로 단련시켜준 덕에 ‘정치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러려니 했지 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연말정산 사태와 연금 개혁안을 보면서 화는 더 쌓여 가고, 즐거운 날은 팍팍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김명호 논설위원 mhkim@kmib.co.kr
[한마당-김명호] ‘정치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입력 2015-05-05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