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걸그룹 스타일리스트라더니… 본색은 협찬 사기꾼?

입력 2015-05-04 03:01

이모(26·여)씨는 지인들 사이에서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의 의상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로 통했다. 유명 연예기획사의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들고 다녔다. 소녀시대를 비롯해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자신을 그들의 스타일리스트라고 소개했다. 그가 의상을 담당한다는 연예인은 소녀시대 외에도 엑소(EXO), 카라, 씨스타, 싸이 등 대형 한류스타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지인 12명에게 한꺼번에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연예계의 복잡한 ‘협찬’ 관행이 배경에 놓여 있었다.

고소인들에 따르면 이씨는 2013년부터 중·고교 동창이나 지인들에게 ‘연예인 협찬’ 얘기를 자주 꺼냈다. “기업마다 홍보를 위해 유명 연예인들에게 자사 제품을 일정 기간 사용토록 제공하는데, 만약 연예인이 그걸 분실할 경우 실제 가격보다 아주 적은 금액만 배상하면 된다”는 거였다. 이를 이용해 “잃어버렸다”고 하고 물건을 싸게 구해주겠다거나 판촉용 제품을 염가에 사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씨는 지난해 7월부터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아예 연예인 협찬 관련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를 매개로 지인들에게 옷과 가방 등을 저렴하게 구매해줬다. 정가보다 훨씬 싸다는 소문이 퍼지자 구매자가 몰려들었다. 판매용 협찬 제품도 다양해졌다. 패션 소품은 물론 승용차와 아파트까지 싸게 살 수 있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이씨가 1억원 상당의 승용차를 2000만원에, 3억원 상당의 주택을 5000만원에 사주겠다며 돈을 받아갔다고 주장했다.

언젠가부터 이씨의 응답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이씨를 통해 승용차를 구입한 A씨는 다른 사람 명의로 할부 판매된 차였음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처음엔 경찰의 개입을 꺼렸다. 다들 이씨로부터 터무니없이 싼 값에 고급 제품을 넘겨받은 적이 있던 터라 사건화하는 게 부담스러워서다. 하지만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먼저 9명이, 그리고 3명이 추가로 그를 경찰에 고소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이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3일 밝혔다. 조사 결과 이씨는 무려 4대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녔다. 피해자들은 경찰에서 “이씨가 돈을 주면 소녀시대에 협찬된 차량이나 드라마 촬영에 협찬된 아파트를 싸게 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했다”며 “휴대전화 여러 대를 이용해 가상의 인물과 협찬 관련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처럼 꾸며 보내주곤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피해액이 모두 27억원에 달한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체 협찬 (피해) 규모는 4억여원에 불과하고 27억원은 내가 다른 피해자의 협박에 끌려가서 억지로 공증을 선 액수까지 포함된 금액”이라며 “4억원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3명에게 돌려줬다”고 말했다.

경찰은 고소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이씨의 금융계좌 등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 외에 이번 사기 사건에 연관된 인물들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며 “몇몇 주변인이 이씨와 모종의 거래를 한 흔적이 있어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양민철 김판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