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재난 앞에서

입력 2015-05-04 00:57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는 먹잇감을 앞에 둔 채 자꾸 동전을 던진다. “앞? 뒤? 정하시요.” “뭘 거는지는 알아야지요.”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댄다. “당신 목숨을 걸었지. 걸었는지 몰랐을 뿐이야.” 안다고 달라질 건 없다. 결과는 앞이거나 뒤. 생(生)이거나 사(死)이거나.

여주인공처럼 말해볼 수도 있겠다. “동전이 결정하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해요.” 죽더라도 내겐 이유가 필요해요. 간절한 여자 앞에서 살인마가 미소 짓는다. “동전도 내 생각과 같을 텐데.” 죽음에 이유 따윈 없어. 노인은 살고 여자는 죽는다. 그들의 생사를 가른 건 선택일까, 동전일까.

그날 아침 뒷산에 나물을 뜯으러 가지 않았다면 일곱 살 네팔 소녀 마야타망의 엄마는 살 수 있었을까. 때마침 고산병이 심해져 병원에 후송되지 않았다면, 셰르파가 돈을 훔쳐 달아나지 않았다면, 30분만 일찍 다라하라 타워에 올랐다면. 그랬다면 한국에서 온 등산객과 그리스 등반대, 무너진 세계문화유산 아래 깔린 수백명 관광객들의 운명은 바뀌었을까?

2015년 4월 25일 오전 11시56분. 규모 7.8의 지진이 ‘세계의 지붕’ 네팔을 뒤흔들기 직전. 그곳의 누구도 자신들이 이제 동전을 던지게 될 것임을, 그 한번의 동전 던지기에 전 생애가 걸려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앞? 뒤?” 채근하는 살인마의 얼굴도 못 봤는데 동전은 던져졌다.

한 평론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우연에 관한 영화”라고 요약했는데 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재난은 우연이라는 악마와의 만남이다.”

네팔 강진으로 현재까지 7000명 넘게 희생되고 15만 채의 집이 완파됐다. 한편에서는 사망자가 1만5000명에 이를 거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무력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예외적인 재앙은 지구적 규모에서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 최근 몇 년의 기억만 더듬어도 목록은 길다. 2011년 동일본(1만5800여명), 2010년 아이티(30만명), 2008년 쓰촨성(8만7000명), 2005년 파키스탄(7만5000명), 2004년 인도네시아(23만명). 불과 2∼3년 간격이다.

과학자들은 “지진은 시점을 모를 뿐 예측이 가능하다”는 말로 위로한다. 문외한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예측불가능’의 에두른 변명처럼 들린다. 재해로 희생된 수십만명의 사람들. 그들이 하거나 하지 않은 선택과 그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벌써 진 봄꽃마냥, 우리가 꾸려가는 일상은 얼마나 연약한 것이던가.

물론 어디나 자신만만한 이들은 있다. 재능 있고 재빠르고 많이 가진 승자들. 재해는 ‘랜덤’이지만 피해는 ‘선택적’이라는 점을 이들은 벌써 간파했다. 쓰촨성과 아이티에서 지진은 빈민가의 허술한 판잣집을 가장 세게 후려쳤다. 인간이 하는 구조라면 더 편파적이다. 네팔에서도 구호자원은 선진국 관광객이 고립된 에베레스트에 몰렸다. 결국 확률과의 싸움이고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일 뿐인가.

이런 결론은 덮친 재앙의 크기를 무시했을 때만 허락된다. 땅이 크게 흔들릴 때는 모두 함께 흔들릴 거다. 추락에도 예외는 없다. 누가 누구의 등을 밟고 올라선다한들 달라질 건 없다.

쩍, 입 벌린 네팔의 대지 사진을 들여다보다 새삼 우리네 이전투구가 시시해졌다. 저 구덩이에 빠질 때 우린 가장 미워했던 적의 손을 잡고 추락할 게 뻔하다. 그러므로 재난의 폐허 위에서 우리가 건질 게 있다면 오직 겸손뿐이다. 공동체 앞에서, 우리의 연약한 현실 앞에서. 이영미 종합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