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근로자의 날’에… “회장님 집 지켜라” 직원에 방호 명령

입력 2015-05-02 02:44
‘근로자의 날’인 1일 오전 3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급 주택가로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한 남성이 졸린 표정으로 내렸다. 이어 ‘집회·시위 과도소음, 쾌적한 주거환경 파괴한다’고 쓰인 흰색 띠를 어깨에 둘러맸다. 꼭두새벽부터 고급 주택가를 찾은 이 남성은 기아자동차 본사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A씨다.

그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자택 앞에 섰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있으라니 있어야죠”라고 짧게 답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전화만 바라봤다.

A씨가 난데없는 ‘회장님 방호’에 나선 사연은 이렇다. 정 회장 자택 근처에는 기아차 사내하청 근로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며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기아차는 이들이 근로자의 날을 맞아 다른 기업 노조와 합류하거나 돌발행동을 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30일 일부 부서에 ‘시위가 있을지 모르니 회장님 자택을 지켜야 한다’는 공지가 내려왔고 몇몇 직원이 한남동으로 차출됐다. 5시간가량을 ‘붙박이’처럼 서 있던 A씨는 오전 8시쯤 아침을 먹으러 가며 다른 직원과 교대했다.

이날 오전 정 회장 자택 주변에는 기아차 관계자 50여명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일부는 A씨처럼 흰색 띠를 둘렀다.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쭈그려 앉아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 있던 B씨는 “팀별로 할당을 받아 나왔다. 보안 부서에서 주로 오지만 다른 부서에서도 온다. 영업직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아차 관계자는 “노숙 농성이 길어지면서 시작된 회사 캠페인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 정작 노숙 농성을 하던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이날 오전 9시30분 자진 해산했다.

양민철 김판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