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울리는 슬픈 영화 속 주인공이 걸린 병이 백혈병에서 치매로 바뀌어 가고 있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으로 세계를 울렸던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1970)로부터 남녀 고등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우리 영화 ‘파랑주의보’(2005)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가슴 아픈 사랑의 이면에는 비련의 주인공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백혈병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세계 영화계에는 치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012년 유러피언 필름 어워드 4관왕에 오른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나 금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에 빛나는 ‘스틸 앨리스’ 등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는 원흉의 위치에는 치매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국 영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풀의 원작만화를 옮긴 ‘그대를 사랑합니다’(2010)는 가족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치매의 현실을 가슴 깊이 전해주기도 했다.
강제규 감독의 최신작 ‘장수상회’는 치매를 소재로 이전에 만들어진 어떤 영화와도 다른 구조와 시각을 담고 있다. 치매가 일으키는 가족관계의 갈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무엇보다도 치매환자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장수상회’는 동명의 동네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고집 세고 까칠한 성격의 노인 성칠(박근형)과 성칠의 앞집으로 이사 온 금님(윤여정)이 벌이는 노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영화가 종반부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은 재개발의 호재 속에서도 수십 년 간 살아온 집을 지키려는 노인의 과거에 대한 집착과 어떻게든 재개발 동의를 받아내려는 슈퍼사장 장수(조진웅)의 대결 속에서 금님이 모종의 역할을 한다는 착각에 빠져들고 만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이자 가장 의미 있는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주인공 성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본인도 관객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던 것.
‘장수상회’는 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시점에서 치매환자와 치매증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과거와 똑같이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도록 인격적인 대응자세를 보이는 일이다. 치매환자는 기억 못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치매환자의 기억이 돌아와 다시 예전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사는 일을 도울 수는 있다. 그것은 영화처럼 연기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 충만한 연기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현실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치매에 걸릴 수 있음을 깨닫고 그 때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건강을 보살피는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내가 과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할 때 나와 나의 시간을 기억하고 치매 이후의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념비 같은 사람들을 주위에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사건을 잊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많은 기념일과 기념물들을 주셨다(출 12:14, 고전 11:24).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인생의 기념비 같은 존재들이다. 사랑의 기념비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비록 치매에 걸려 기억하지 못해도 그들을 통해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진구(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교수, 영화평론가)
[강진구의 영화산책] 기억하지 못해도 사랑합니다
입력 2015-05-02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