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 덩 덩.’
지난 24일 강원도 태백시 외나무골길 97(하사미동). 강원도 강릉시와 태백시를 연결하는 35번 국도변에서 1077m의 덕항산 자락 쪽으로 1㎞를 오르면 기독교 공동체 예수원(Jesus Abbey)이 나온다. 오전 11시50분쯤, 수채화 같은 예수원 건물 사이로 종소리가 울렸다. 예배를 알리는 종이었다. 예수원은 하루 세 번 예배를 드린다. 오전 6시 아침예배(조도)를 시작으로, 정오에 점심예배(대도), 오후 7시30분에는 저녁예배(만도)를 드린다. 정오예배는 중보기도에 전념하는 대도(代禱) 시간. 공동체 신자들이 하나둘 예배실로 모였다.
정오가 되자 다시 종이 울렸다. 3번씩 여섯 차례에 걸쳐 울렸다. 신자 50여명이 대예배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침묵 기도를 올렸다. 손을 모아 정면을 응시하는가 하면 허리를 굽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찬송을 불렀다.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예배실 전체에 울리는 찬송은 가슴을 울렸다. 마지막 소절 “또 추한 생각을 다 버리니 정결한 맘 내게 늘 줍소서”는 기도가 되었고 결단의 언어로 변했다.
인도자는 이어서 대도록을 읽으며 기도를 인도했다. “주님, 한국교회가 교파와 교단을 뛰어넘어 형제자매로 사랑하고 연합하게 하소서.” “신자들이 세상의 유혹을 멀리하고 거룩한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예수원의 대도는 한국과 세계, 개인과 사회를 넘나들었다. 기도 방법은 인도자가 대도록에 따라 기도를 ‘읽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며 후렴을 넣었다. 설립자인 대천덕(2002년 별세)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다는 점에서 예수원의 기도는 성공회 영향을 받았다. 대도는 교회, 세상의 정의와 평화, 병자들을 위한 순서로 이어졌다. 기도시간만 30분이 넘었다. 1965년 예수원이 창립된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예배 현장이다. ‘기도의 실험실’ 예수원이 이번 달,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예수원 공동체 신자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칭했다. 이들은 예수원을 ‘집’으로, 자신들을 ‘식구’로 소개했다. 대도를 마치자 식구들은 점심식사 채비를 했다. 예배실은 순식간에 식당으로 변신했다. 이날 점심 메뉴는 국수였다. 예수원의 ‘삼시 세끼’ 역시 그동안 변화가 없었다. 오전에는 밥과 김치, 점심은 국수, 저녁은 약간의 반찬을 더한 식사가 이어지고 있다. 음식은 남기지 않는 게 원칙이다. 최근 점심은 밥으로 변경됐으나 한 주에 한 번씩은 국수와 수제비가 번갈아 나온다고 한다.
중보기도의 용사가 되다
30년 전 예수원에 들어와 식구가 된 민경찬(58)씨는 기자에게 “한 그릇 더 먹으라”며 권했다. 그는 28세에 예수원 생활을 시작해 여기서 결혼하고 5명의 자녀를 두었다. 85년 서울에서 식당을 하던 민씨는 쉬는 날이면 지하철 종각역의 종로서적에 자주 갔다. 그날도 2층 기독교 코너에서 책을 보던 중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를 집었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고 선 채로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는 한 문장에 시선이 꽂혔다. ‘예수원은 중보기도의 용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다.’ 뭔가가 자신을 낚아채는 것 같았다. 민씨는 그 길로 서울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됐다.
“대천덕 신부가 쓴 칼럼을 모은 책이었는데 마치 성령님이 쓴 것 같았어요. 기도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무작정 예수원으로 향했습니다. 하루 2시간30분씩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구했습니다.”
예수원은 특정 교파보다는 진리를 따라 살고, 성령 안에서의 삶을 중시한다. 예수원은 가난하다.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다. 50년 예수원 역사는 물질적 필요를 구하는 대신 하나님을 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날 증거’이다. 민씨는 “우리는 필요에 집중하기보다는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 집중한다”고 말했다.
‘기도의 집’ 예수원은 매일 공동체로 모여 시간의 십일조를 드린다. 식구들은 하루 세 번씩 예배를 통해 평균 2시간30분을 기도한다. 내용은 조금씩 바뀌곤 했으나 예수원의 기본 방식으로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한국교회의 실험실, 그리고 이후
예수원은 65년 당시 대천덕 신부 가족과 성미가엘신학원 학생, 항동교회 신자와 건축노동자로 함께 일하던 형제자매들에 의해 설립됐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강원도 산골짜기에 예수원 공동체를 세우고 한국교회의 실험실로서 그 사명을 다해왔다.
중보기도와 성령의 임재는 한국교회에 성령 사역의 첫 문을 열었고 대천덕 신부가 레위기(25:23) 말씀을 통해 강조해온 토지관은 성경적 토지정의운동을 시작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전개된 해비타트운동과 기독교세계관운동, 통일운동 등은 모두 예수원에서 흘러간 ‘예수 운동’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원을 찾았다. 조폭 두목부터 유명 복음전도자, 목사, 넝마주이, 군인, 다문화 청소년, 경찰, 미국 청소년과 대학생, 수많은 한국 청년과 가족들이 예수원을 거쳐 갔다. 1년 평균 8000∼9000명이 다녀갔다. 70년대 말에는 한국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데이비드 로스(오대원) 목사가 청년들을 데리고 와 당시 축사를 급히 개조해 손님방으로 만들기도 했다. 68년도에는 무장간첩이 침투해 예수원이 국군의 집결지가 된 일도 있었다.
앞서 67년 영국인 발레리 포드라는 여성은 영국의 수도원 격인 ‘리 애비’에서 일하다 한국 예수원 설립 소식을 듣고 2년을 기도로 준비하고 3주에 걸쳐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예수원까지의 길은 멀고 험해 기차로 당시 황지(현 태백)에 도착, 다시 3시간30분을 눈보라를 뚫고 예수원에 도착했다. 그가 이런 과정을 거쳐 온 것은 예수원 부엌에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뿐이었다. 대천덕 신부의 아내 현재인(2012년 별세) 사모는 저서 ‘예수원 이야기’(홍성사)에서 발레리에 대해 “그는 부르심에 반응한 첫 사람이었다”며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예수원 사역은 75년 ‘삼수령 목장’이 마련되면서 확장됐다. 삼수령이란 한반도 유일의 세 갈래 분수점(백두대간과 낙동 정맥, 두 산맥이 만나는 곳)으로 태백시에서 예수원이 있는 하사미마을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만나는 ‘피재’와 접해있다. 목장에는 현재 2개의 축사에서 소 70마리가 길러지고 있다. 축사 2채는 각각 ‘산수’와 ‘갑산’으로 북한 선교 비전을 가졌던 대천덕 신부가 북한의 지명 이름에서 땄다. 이후 삼수령연수원을 통해 통일한국을 위한 ‘네 번째 강 프로젝트’와 기독교 대안학교인 ‘생명의 강’ 학교를 시작했다. 지금은 목장 식구 18명과 학교 스태프 11명 등 29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이영철(62)씨는 83년 예수원 식구가 돼 32년째 생활하고 있다. 목장에서 만난 그는 소들에게 사료를 주고 있었다. 식구들은 그를 ‘솔로몬 형제’로 불렀다. 그는 “나는 나그네였으나 이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예수를 만나 내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대천덕 신부의 기억을 물었다. “신부님은 예수원이 대천덕의 제자를 키우는 곳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 곳이라 강조했어요. 조금만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여기 나를 보러 왔는가. 그러면 당신은 우상숭배자다’ 하며 경계했지요.”
예수원 식구인 최요한(45)씨는 “예수원은 손님들이 삶을 나누고 기도하는 곳이다. 뭘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며 “앞으로의 예수원은 이러한 터를 제공하는 곳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원은 5월에 다양한 행사(표 참조)를 개최해 지나온 날을 되새긴다(033-552-0662).
태백=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미션 르포] 설립 50주년 ‘기도의 실험실’ 예수원, 하나님 구할 때 어떤 일 일어나는지… ‘증거’ 되다
입력 2015-05-02 0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