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9일(현지시간)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언급한 과거사 내용에 대해 미국이 호평하고 일본 내에서도 “과거보다 진전됐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오는 8월 그가 발표할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의 수위를 테스트하려던 차원이었던 이번 ‘알맹이 없는’ 연설이 먹혀들면서 사실상 과거사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도 물 건너간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번 영어 연설에서 거론한 2차 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deep remorse)’은 외무성이 제공한 연설문의 일본어 번역본에는 ‘통절한(痛切な) 반성’으로 번역됐다. 비슷한 표현을 썼던 지난 22일 반둥회의 연설문의 경우 ‘깊은(深い)반성’으로 번역됐었는데 마치 이번에 더 엄중하게 반성한 듯 비쳐지게 했다.
아사히신문 등 주요 일본 언론들도 30일 아베 총리의 연설에 대해 일제히 ‘통절한 반성’이란 단어를 제목으로 전했다. 아베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 보다 진전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도쿄신문의 취재에 응한 일본 정부 당국자는 “의도적으로 (일본어 표현을 ‘깊은 반성’에서 ‘통절한 반성’으로) 바꾼 것은 아니다”며 “두 말의 의미가 비슷하지 않냐”고 말했다.
‘통절한 반성’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전후 50주년 담화(무라야마 담화)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용한 용어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언급한 ‘통절한 반성’은 무라야마 담화에서 언급한 ‘반성’과 맥락이 다르다. 무라야마 담화에선 반성의 대상이 ‘식민지배와 침략’이었지만 아베가 말하는 반성의 대상은 ‘앞선 대전’이다. 이는 외형적으로만 무라야마 담화의 일부 표현을 계승한 듯한 인상을 줘 일본 내 반발 목소리를 누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의 이중적 수사법은 연설문 중 미국에 대한 사과 부분에서도 드러났다. 2차 대전을 언급하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반성(remorse)’이란 표현을 쓴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가슴 속 깊이 회개(repentance)하며 묵념했다”는 등 보다 강도 높은 반성의 표현들을 동원했다.
연설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전쟁의) 책임이 일본 측에 있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했다”고 칭송하면서 아베 총리를 치켜세웠다.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본 미국대사도 “(역사 문제에 관한) 과거 정부의 담화를 명확하게 지지했다”며 긍정 평가했다.
외교가에서는 아베 총리가 이 정도 수준의 약한 언급만으로도 ‘좋은 평가’를 얻어낸 이상 70주년 담화도 과거사 문제를 밋밋하게 다룰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아베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침략 사죄를 생략한 채 연설한 날 일본의 대표적 전쟁 반성 박물관인 오사카 국제평화센터(일명 피스 오사카)에서는 각종 전시물 설명자료에서 ‘침략’이라는 표현이 일제히 삭제됐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관련기사 보기]
[아베 美의회 연설 후폭풍] 日번역본에 “통절한 반성”… ‘무라야마 담화’ 계승 꼼수
입력 2015-05-01 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