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마음의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섭취하고 힘을 재충전하는 '대지'와 같은 곳이다. 또 한 인간이 태어나 20∼30년 동안 교육받는 가정은 '마음의 그릇'을 구워내는 가마와 같은 곳이다. 가정이 소중한 사실은 누구나 잘 알지만 정작 가족의 가치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다.
5월 한 달 동안 '가족행전'을 통해 크리스천 가정이 지켜 행해야 할 다섯 가지를 제안해 본다.
'사도행전'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기록했듯 가족들이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가족행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가족의 의미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뿐 아니라 책임감과 사랑으로 형성된 공동체를 포함한다.
“선교사님, 집안에 큰 피해 없으셨어요? 다른 분들도 다 괜찮으신 거죠. 더는 여진이 없어야 할 텐데요. 기도할게요.”
“네 사모님. 감사합니다. 피해본 형제들도 있지만 하나님 축복으로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형제자매님들의 안부전화와 중보기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종로 53길 초원교회(이준원 목사) 사택 현관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 이 교회 오미선 사모와 네팔 출신으로, 귀화한 한국인 여호수아 선교사였다. 지난 25일 발생한 네팔 지진 소식에 1만6000여명의 재한 네팔인들은 초긴장 상태다. 네팔 선교 중심교회 초원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 안타까움이 컸다.
네팔인 선교 중심 초원교회
이날 여호수아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 동대문역 3번 출구를 나와 53번길에 접어들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에베레스트 레스토랑’ ‘히말리야여행사’ 등 네팔어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마야 마트’ 등 네팔인을 위한 용품을 파는 작은 상점이 많았다. 네팔타운인 셈이다.
약간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1970년대 향수를 자아내는 한옥 담에 ‘마음의 쉼터, 영혼의 고향 초원교회로 가는 길’이라는 플래카드가 여호수아 선교사 집을 향한 이정표가 되어 안내했다. 초원교회 주변은 우리나라 봉제산업의 모판 창신동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초원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중앙교회가 복음의 전진기지로 이 일대 구령에 힘써 왔다.
창신동은 허름한 단독주택과 ㅁ자형 한옥, 연립주택 등이 무질서하게 뒤엉킨 달동네. 골목마다 스티로폼 화분이 몇 개씩 줄지어 서 있다. ‘시야게’ ‘워싱’ ‘아일렛’ 등 봉제 전문용어 간판이 몇 집 걸러 툭툭 튀어나온다. ‘동경칼라현상소’ ‘천수암’ 같은 간판도 새삼스럽다. 전봇대엔 인터넷 설치 현수막이 어지럽다.
종로 53길 OO-O. ‘귀화 한국인 여호수아’가 사는 즐거운 나의 집이다.
여호수아의 네팔 이름은 ‘나가르코티 다르마 라주씽’이다. 줄여서 다르마(49)라고 부른다. 부인은 샨티(35). 평화라는 뜻을 지녔다. 큰아들은 아누그라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의 한국 이름은 ‘영광’(16·인천 한국국제크리스천학교)이다. 지난해 봄 태어난 둘째 아들은 ‘다축복’이다.
집은 좁았다. 40㎡(12평)쯤 될까. 간이 소파가 들어선 거실은 2∼3명 앉기도 불편했다. 부부의 방엔 다축복이의 보행기가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손님을 맞은 샨티는 커피믹스를 내왔다. 큰아들 영광은 학교에 가고 없었다.
초원교회 중심 네팔타운
“지진 소식을 25일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지하철 안에서 들었어요. 환자 심방 갔다가 올라오던 길이었죠. 아는 분이 페이스북에 올려서 알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어요. 마음이 많이 무거웠죠. 네팔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잘 닿지 않았어요. 당장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여진이 계속된다는 소식에 더욱 침통했죠. 이튿날 주일 오전 11시 ‘네팔 가족예배’에 수십 명이 참석했어요. 피해 입은 이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 가족이나 친척은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초원교회에 출석하는 유학생 프라모드(한성대)는 큰아버지 집이 무너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사는 마을은 마을 자체가 통째로 없어졌다. 프라모드는 한국에서 예수를 영접한 신실한 학생이다.
이번 네팔 지진으로 여호수아는 정신이 없을 정도다. 재한 네팔인들의 지진 관련 피해자 돕기 행사 등으로 잠시도 앉아 있을 새가 없다. 평상시에도 초원교회 네팔선교회를 이끄는 그는 네팔 노동자의 통역 등 교역자 일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다. 늦둥이 다축복을 안을 시간도 없다.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죠. 가장으로서 모자라니까요. 그렇지만 일이 바쁘다고 피곤하진 않습니다. 주님 사역이니까요. 예수가 날 사랑하신 것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보잘것없어요.”
네팔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기 전 공허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장군이었고 아버지와 형님 한 분은 대령이었던 군인 집안.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다. 수도 카트만두 다리부먼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폐 전문 병원 직원으로 근무했다. 10형제 중 여덟째.
그럼에도 그의 공허는 해소되지 않았다. 힌두의 각종 신에 의지했지만 답이 얻어지지 않았다. “나의 갈급한 마음은 생후 6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에겐 4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에겐 새어머니들이었다.
여호수아는 20대에 한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됐다. 그들은 예수 믿기를 권했다. “공허함이 풀리지 않아 성경을 읽었는데 사랑, 진실, 용서, 구원 등의 말이 나를 움직였다”고 고백했다. 여호수아는 어느 날 시내 파턴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그리고 그 교회 멍글만 마하르잔 목사를 만났다.
“비로소 평안이 왔어요. 한국에 있는 네팔 외국인노동자들의 실태도 알게 됐고요. 많은 네팔 외국인노동자들이 복음 부재로 삶이 곤고하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인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기도로 간구했어요.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해달라고요.”
2000년 그는 파턴교회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첫 선교지는 경기도 안양·의왕시 지역이었다. 서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선교에 힘썼다. 가난한 나라 선교사의 삶은 외국인노동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을 되새기며 한국 파송 선교사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그때 아내와 아들은 경제적 여건 등을 감안, 데려오지 못했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그를 뒷받침하던 국내 선교회는 사정이 여의치 않자 경제적 지원 등을 끊었다.
"2002년 좌절하고 귀국했어요. 그때 이모님이 중풍으로 아프셨는데 저의 기도로 완쾌되었어요. 제가 신유 은사를 입었었어요. 많은 분들이 제게 매달렸죠. 가족 절반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이런 역사가 임하자 저는 아내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2003년 다시 네팔인 사역을 위해 들어왔어요."
재입국한 그는 네팔인이 많이 모이는 창신동 초원교회 예배당에서 혼자 눈물의 기도를 하곤 했다. 월요일마다였다. 노동하고 번 돈으로 자비량 선교를 하던 때였다. 이 역시 너무 힘들어 "하나님, 이게 뭡니까. 주일 예배도 참석하지 못할 만큼 혹독한 노동 속에서 어찌 형제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라고 원망도 했다. 그때마다 말수 적은 아내는 "당신은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니 네팔 형제들을 가나안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부부는 안고 기도했다.
샨티 또한 생활고와 타문화 적응의 어려움 등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호수아는 그런 아내를 위해 네팔 여성 소모임을 결성해 성경 공부와 부업으로 단추달기 등을 주선했다. 부부는 어려움에 지혜롭게 대처했다. 초원교회도 그의 헌신에 네팔선교회를 발족하고 본격 네팔 복음화에 나섰다. 그는 리더가 됐다.
지금 여호수아 부부가 살고 있는 건물 '쉘터(shelter)'는 네팔인 복음화를 위한 전진기지가 됐다. 일자리 없는 노동자, 가난한 유학생, 돈이 모자라는 여행자 등에게 초원교회 부설 '쉘터'는 교회며 집이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한국 거주 네팔인의 대부가 됐다.
"경찰서에 가서 사고 친 네팔인 통역도 하고, 산업재해 입은 노동자의 법률 절차를 대신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여호수아를 샨티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편은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생활이 곤궁하더라도 네팔의 여인들은 사랑하는 남편의 길이라면 따르죠. 저 또한 그렇습니다."
복음의 떡 나누는 네팔 형제들
여호수아에게 '선교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가족에게 미안했을 때' 두 가지를 물었다.
"경기도 의정부시 송우리 공단 예배를 이끌 때였어요. 청바지 공장 네팔 형제 하나가 복음을 질색하며 힐난했어요. 한데 어느 날 그가 독극물을 생수로 착각하고 마시고 사망 직전에 이르렀어요. 저는 그 형제의 병원 입원 등 모든 것을 맡아 책임졌어요. 하지만 그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죠. 숨지기 전 그는 예수를 영접했어요.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가족에 대한 질문에는 "이 땅의 아버지들은 가족에게 미안해하죠"라며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재촉하자 어렵게 말했다. "영광이가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시킨 일"이라고 말했다.
여호수아는 개발도상국 네팔 교회가 한국으로 보낸 가난한 선교사다. 한국 교회는 그가 공부를 더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여호수아는 2013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초원교회 네팔선교회를 통해 네팔인 전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그 선교회 쉘터에서는 오늘도 네팔의 형제들이 먹고 자며,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네팔은 전통 대가족이 끈끈하게 뭉쳐 있어요. 가족만이 내 형제라고 인식하죠.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보니 예수 믿는 이들이 복음 안에서 참된 가족이에요. 네팔 노동자들이 교회 쉘터에서 하루를 묵고 떠나도 그들은 귀한 복음의 경험을 한 거예요. 복음을 나눈다면 그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일이죠. 형제고 가족이 된 거죠." (도움 주실 분: 초원교회 02-763-6410)
자봉가족이란 자원봉사를 하는 가족을 말한다. 가족 전체가 어려운 이웃이나 기관을 정해놓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방문하자.
자원봉사는 자녀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자원봉사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성장한 자녀들은 봉사가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가족행전-①자봉 가족이 되자] 여호수아 선교사 “지진 고난 닥친 고국 도울 수 없어 기도에 매달립니다”
입력 2015-05-02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