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현지시간) 20인승 승합차를 타고 네팔 신두팔초크로 들어가는 산길에는 비가 쏟아졌다. 신두팔초크는 수도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차를 달려 4시간 넘게 걸리는 벽지다. 이곳에서는 이번 지진으로 1200명 가까이 죽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외지인들에게는 지명조차 낯설다. 신두팔초크의 비극은 카트만두의 비극에 가려져 있다. 기자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을 따라 이 지역을 찾아갔다. 전날까지만 해도 접근금지 지역이었다.
폭 4∼5m의 도로가 굽이치는 산허리를 감아 올라갔다. 굴곡이 심하고 울퉁불퉁했다. 일부는 10∼20㎝ 너비로 갈라져 있었다.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찬 차가 널을 뛰었다. 길가 여기저기에 사람 몸통만한 낙석들이 처박혀 있었다. 25일 지진 때 산 위에서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운석처럼 쏟아졌다. 소형 승용차나 1.5t 트럭만한 바위들이 치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차는 거친 돌 곁을 기어가듯 비켜갔다.
도로 옆으로는 돌을 촘촘히 쌓고 철망을 씌운 벽이 짓눌려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뿌리째 뽑힌 나무들도 나뒹굴었다. 나뭇가지들이 차창을 두드리는 손들처럼 유리창에 부딪혔다. 차가 속도를 낼수록 소리는 더 다급해졌다. 지난해 8월 산사태로 파괴됐다는 마을을 지났다. 15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커다란 잿빛 바위들만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다이너마이트에 폭파된 바위산 정도로 짐작했을 것이다.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은 서서히 드러났다. 도무지 성한 집이 없었다. 학교도 무너졌다. 주민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잔해를 걷어냈다. 여자아이 것으로 보이는 선홍색 고무 슬리퍼가 돌에 깔려 있었다. 봉사단 차량 행렬이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면 주민들이 몰려왔다. 20㎏짜리 쌀 포대 700여개를 나눠 실은 3t 트럭 3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선두 차량에 동승했던 무장 경찰들이 내려 그들을 떼어놓았다. 그러기를 여덟 번 반복했다.
경찰들은 앞서 신두팔초크 초입에서 우리 차량을 멈춰 세웠다. 위험하니 우리끼리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지 가이드는 “주민들은 소외감에 화가 나 있었다. 한 경찰 고위 간부는 이런 주민들에게 얻어맞았다”고 했다. 경찰들은 동행하기로 하면서 차에 붙은 구호 표시를 떼게 했다.
오후 5시쯤 신두팔초크의 가장 깊은 마을 중 한 곳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출발한 지 5시간 반 만이었다. 산길을 따라 좌우로 길게 늘어선 집과 상점은 모두 만신창이였다. 경찰서도 부서졌다. 위층이 붕괴된 3층 건물에 들어갔을 때 쿵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한 주민 여성은 “사흘 전 지진 때는 온 산이 10분간 흔들렸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계단식으로 깎은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마을에서부터 전선을 길게 끌어와 듬성듬성 불을 밝혔다. 풀밭 한쪽에 놓인 콘센트에는 휴대전화기 10여개가 꽂혀 있었다. 어두워지자 충전 중임을 알리는 빛들이 밤하늘 별처럼 보였다.
콘센트 옆에는 위성접시와 빔 프로젝트,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몇 차례 실패 끝에 가로 4m, 세로 2m 크기의 와이드 영상이 6∼7m 앞 3층 건물 벽면에 나타났다. 미국 CNN방송이 네팔 지진 소식을 전했다. 주민들은 담담하게 시청했다. 재난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되는 것인가. 아이들은 밤에도 산을 뛰어다녔다. 뉴스에선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네팔 남성의 사연이 이어졌다.
강창욱 특파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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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30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