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성’으로 통하는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을 쓴 건 15년 전이다. 지난해에는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연구교수 출신인 이혜정씨가 서울대 최우등생들의 문제점을 분석해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란 책을 냈다. 이번에 나온 ‘공부의 배신’은 미국 엘리트 대학생들을 겨냥한다. 이들이 특권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같은 방향으로 온순하게 걸어가는 ‘똑똑한 양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씨는 자신의 책에서 서울대 우등생들을 “교수가 정한 울타리를 단 한 치도 넘어서지 않고,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뜨거운 열정과 몰입보다는 철저한 절제와 조절로 자신을 잘 관리하는 학생들”로 묘사한다. 예일대 영문과 교수 출신인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관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리트 교육 시스템은 똑똑하고 유능하며 투지가 넘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소심하고 길을 잃고 지적 호기심이라고는 거의 없는, 목표의식이 부족한 학생들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학생, 강사, 교수로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머문 24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8년 ‘엘리트 교육의 허점’이란 평론을 발표했다. 소규모 문학계간지에 실린 글은 뜻밖에도 온라인에서만 1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이슈가 되고 만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의 우수한 젊은이들 사이에 넓게 퍼져 있는 불만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으며 전국 대학을 돌며 학생들과 얘기를 나눈 결과를 이 책으로 정리했다.
한 학생은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교수님은 예일대 학생에게 ‘네 열정을 찾아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 방법을 모릅니다.” 하버드대 학장을 지낸 사람은 “이 아이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책은 부모와 사회가 그토록 바라는 명문대학의 정문 안쪽에서 엘리트 학생들이 두려움과 불안, 좌절, 공허함, 목적 없음, 고독 등에 시달리고 있음을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성공’만 있고 ‘배움’이 사라진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 초래한 비극이다. “엘리트 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최우수 운동선수처럼 키워졌다”는 비유는 날카롭다.
“만약 ‘하버드대학에 들어가려면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이들은 열심히 물구나무를 설 것이다. 부지런하고 능숙하게.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일들을 할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부모의 매니지먼트와 지원 아래 질문이나 의심 따윈 눌러버리고 일탈이나 방황 한 번 없이 달려온 덕분에 그들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숙제를 해오고, 질문에 답하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배워왔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시스템이 정한 경계를 의심할 줄 모른다. 이 순응적인 아이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고, 이들의 핵심단어는 ‘안전’이다. 졸업 후 컨설팅 회사나 투자은행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학생은 이를 ‘가능성의 역설’이라고 표현했다.
“제가 친구들에게 왜 컨설팅 회사에 취업하려는지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한 말은 한마디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무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배짱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씨는 추천글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는 ‘좋은 대학’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미국도 일본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공부 기계’ 전락한 엘리트 학생들
입력 2015-05-01 0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