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2013)에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장면이 있다. 1981년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악질 고문자 차동영 경감(곽도원 분)이 대학생을 구타하던 중 국기 하강식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돌연 경례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국가관이 투철했던 공무원만 그랬던 게 아니다. 복고 영화 ‘국제시장’(2014)에서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는 부부싸움 와중에도 국기 하강식이 있자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랬다. 아침, 저녁 국기 게양과 하강에 맞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를 통과해온 기성세대에게 국기는 가부장적 아버지마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태극기 패션’이 나오지 않는 건 국력 콤플렉스 탓이 다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국기를 감히 패션 소재화’하려는 발상을 할 수 없는,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외국의 국기는, 정확히 선진국의 국기는 패션 아이콘이다. 미국 성조기와 영국의 유니언잭이 대표적이다. 남의 나라 국기인데도 성조기와 유니언잭 문양의 점퍼와 T셔츠를 입고 다닌다. 유니언잭 백팩도 인기다.
우리에게도 태극기가 ‘친구 같은 아빠’처럼 다가온 경험은 있다. 2002년 월드컵 때다. 서울 시청앞 광장 등 곳곳에 함께 모여 집단 응원전을 펼치던 젊은층은 첫 4강 신화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다. 태극기를 흔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몸에 둘렀고, 얼굴에 그렸다. 여성들은 태극기로 야한 톱(끈 없는 상의)을 만들어 입기까지 했다. 태극기 패션은 거기까지였다. 태극기 문양의 기성 패션 제품이 나온 걸 보지 못했다.
신간 ‘덴마크 사람들처럼’(출판사 로그인)에 부러운 대목이 있다. 덴마크는 유엔이 추산하는 ‘행복지수’ 세계 1위(2012·2013년)를 기록해 주목 받은 나라다. 저자 말레네 뤼달은 제 나라가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를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서야 깨달았다며 덴마크 행복 비결을 분석했다.
거기 사람들은 덴마크 국기 ‘단네브로’(덴마크의 힘이라는 뜻)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집집의 정원에는 깃대 위에 국기가 펄럭인다. 크리스마스트리도 국기로 장식한다. 심지어 생일 케이크에도 양초와 함께 단네브로를 빙 둘러 꽂는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다. 지금도 관 주도로 국경일 태극기 달기 캠페인이 펼쳐지는 한국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1주년 추모 집회에서 참가자가 태극기를 불태운 사건이 논란이 되고 있다.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방화범’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고 밝힌 바 있다.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층, 집권여당이라면 분노 표출을 둘러싼 배경에 관심을 갖는 게 마땅하다. 문제 아이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1주년이 됐지만 누구도 사회 안전망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사 책임 규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지 않는 나라에선 생일 케이크 위에 태극기가 꽂힐 리 없다.
덴마크에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뜻하는 ‘휘게 문화’가 있다. 휘게 문화가 사회로, 국가로 확장돼 나타난 게 케이크 위에 꽂은 국기다. 우리도 스스로 좋아서 케이크에 너나없이 태극기를 꽂고, 페이스북엔 그런 사진이 무시로 올라오는 나라를 꿈꿔본다.
손영옥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내일을 열며-손영옥] 생일 케이크 위에 태극기 휘날리려면
입력 2015-04-30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