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신앙을 지켜왔지만 아버지는 믿음이 약한 분이었다. 가부장적이고 유교사상이 강해 특히 딸들에게 냉정했다. 자라면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들과 딸의 차별이다. 형편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딸들은 공부를 안 시켜도 된다”며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수업료도 제때 주지 않으셨다. 딸들 수업료를 일꾼 품삯으로 내놓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설움을 당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벌면 무조건 땅을 사고, 교육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학교에서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미술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됐지. 빨리 돈 벌어서 시집 가면 그만이야.”
그런 아버지가 싫어 수차례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결혼을 일찍 한 것도 아버지에게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987년 10월 15일 결혼했다. 그때 나이 스물셋, 남편은 스물일곱이었다. 나와 달리 남편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가운데 자랐다. 시어머니는 음식점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4남매를 키우신 분이다. 남편은 어머니와 누나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공부를 마쳤다. 평생 남편 잘되는 것만 바라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서로 호감을 느껴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했다. 당시 남편은 군에서 막 제대한 상황.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아들이 여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느 어머니가 환영하겠는가. 물론 우리 집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거였다. 사는 형편도 달랐다.
남편은 굉장히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착하고 성실했다. 결국 그런 남편의 모습에 감동한 부모님은 결혼을 하락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께 최선을 다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 나의 깊은 내면에는 어른께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성경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남편 없이 외롭게 살면서 고생한 시어머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시외할머니도 9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결혼하고 2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교회 나가는 며느리를 반대하셨다. “네가 교회에 나가니까 남편이 승진도 안 되고, 집안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가정에서 종교는 하나여야 한다.”
승진 심사에서 몇 번 떨어지자 남편도 어머니와 합세했다. 거금을 들여 굿판까지 벌일 정도로 어머니는 남편이 잘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모습에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아니, 아예 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 한 사람이 종교를 바꿔 집안이 잘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그 생각만 되뇌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믿음인가 말이다.
결국 교회를 스스로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 집안에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나는 승승장구했다. 시어머니는 “삼재(三災)가 들었다”며 사업을 반대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많이 벌었다. 그땐 그게 성공인 줄 알았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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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01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