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살해 협박이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다짐했다. 그간의 사정을 진술하려 입을 여는 순간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것만 말하세요.” 피해자 조사를 받던 30대 여성 윤고은(가명)씨는 고개를 숙였다.
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는 윤씨는 2013년부터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지난해 3월 정신과 진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 A씨(71)가 ‘성(性)치료’ ‘허그(포옹) 치료’라며 윤씨를 성폭행했다. 윤씨는 A씨를 고소했고 경찰은 지난해 4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 일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A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건은 종결됐다.
하지만 윤씨를 괴롭힌 사람은 또 있었다. 2013년 5월쯤 서울 송파구 정신병원에서 만난 보호사 김모(55)씨가 스토커로 돌변했다. “넌 내 거야” “마음에 드는 암컷을 차지하려 싸우는 건 수컷의 본능”이라면서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윤씨가 퇴원한 뒤에도 김씨의 스토킹과 폭행은 계속됐다.
지난 20일에는 급기야 집에 찾아와 “눈을 쑤셔버리겠다”는 등의 살해 협박을 했다. 윤씨는 김씨가 한눈을 판 사이 휴대전화로 112에 신고했다. 잠실지구대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김씨는 만취 상태였다. 김씨는 경찰에게 “XX 아무 것도 모르면서”라고 고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경찰은 김씨를 무혐의 처분하고 석방했다. 윤씨가 “저 아저씨(김씨)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으면 풀어줘도 상관없다”고 한 말을 근거로 한 조치였다. (경찰은 지난 22일 이 사건에 대해 “윤씨의 신고 당시 김씨가 휴대전화를 가로챘는데 112 직원이 기지를 발휘해 ‘누님 좀 바꿔주세요’라며 동생 행세를 해서 주소를 파악했다”는 홍보성 보도자료를 냈다.)
윤씨가 이런 말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씨는 윤씨의 나체사진을 갖고 있다. 윤씨는 “내가 수면제(졸피뎀)를 먹고 잠든 사이에 김씨가 나체사진을 찍어 ‘니캉내캉’이란 제목의 파일로 휴대전화에 가지고 있었다. 그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신고하기가 두려웠었다”고 했다.
윤씨는 당시 경찰에 이런 사실을 다 털어놓으려 했다고 한다. 남자 수사관 앞에서 그동안 나체사진 때문에 끌려 다녔던 일, 김씨에게 당한 폭행 등을 용기 내 말하려는데 돌아온 말은 “이번 일만 말하라”였다는 것이다.
담당 수사관은 28일 “정식 고소장이 접수되지 않은 터라 일단 접수된 사건에 대해 확인하려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른 경찰은 “김씨가 윤씨 집에서 전날 밤 같이 잤다”며 “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윤씨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2013년부터 내연관계였다”고도 했다.
경찰의 말처럼 윤씨는 가해자 김씨와 정말 내연관계였을까. 2013년 김씨와 함께 병원에서 근무했던 간호사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씨는 계속 윤씨 옆에서 치근덕거렸다. 따라다니며 사귀자고 하고 남자 환자들이 윤씨에게 접근하면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내연관계는 전혀 아니다. 윤씨는 김씨 문제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김씨는 알코올 의존증 문제가 있었다. 이 병원은 김씨 같은 자격 미달 보호사를 고용하는 등 법규 위반 사실이 적발돼 문을 닫은 상태다. 김씨는 경찰 조사 직후인 지난 21일에도 알코올 의존증 치료 명목으로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윤씨는 송파경찰서에서 조사받으며 지난 16일부터 시행된 ‘범죄 피해자 권리 및 지원제도’에 대한 안내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당시 작성된 조서에는 ‘범죄 피해자 권리 및 지원 정보에 대한 안내서를 교부받았느냐’는 질문에 윤씨가 ‘예’라고 답한 걸로 돼 있다. 그러나 윤씨는 “당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진술조서를 천천히 읽어보지 못했다. 이런 정보가 있는지 몰랐고 안내서를 받지도 못했다”고 했다.
윤씨는 “지난 27일 노원경찰서 원스톱상담센터에 김씨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할 때 피해자 권리를 처음 설명 들었고 자필로 서명했다. 20일 조사 때 알았다면 신변안전 조치를 요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조울증 환자여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경찰 발표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50대 아저씨와 나를 내연관계로 공표한 경찰로 인해 두 번 피해를 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윤씨를 여러 차례 만나 취재했다. 민감한 얘기에는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체로 차분하고 진지하게 답변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이유로 경찰이 진술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28일 오후 4시50분 윤씨의 휴대전화에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는 김씨의 문자메시지가 또 날아들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단독-사건 인사이드] 살해 협박·폭행… 경찰, 조울증 이유 진술 묵살했다
입력 2015-04-29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