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깊은 산골 전북 진안군이다. 1965년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 도회지인 충남 금산 땅으로 이사했다. 할아버지 대부터 인삼 및 약초 농사를 지었는데 그 덕분에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은 3대째 믿음의 가정이다. 당시 우리 동네 한가운데에는 뾰족탑의 교회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학교 외에는 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작은 아버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 교회에 열심히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보니 할아버지도 자연스레 교회로 걸음을 했다.
그래서일까. 추운 겨울에 인삼 농사 재료 준비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가족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찬양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항상 틀어놓았다. 어른들은 일하면서 찬양을 따라 불렀다. 나 역시 어머니, 언니를 따라 익숙하게 찬양을 불렀다.
할아버지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유학자에다 한의사였던 할아버지는 침을 잘 놓으셨다. 어려운 이웃에겐 돈도 받지 않고 침을 놓아주셨다. 내가 한의사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금산농악 보유자로 지방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분이다.
할아버지는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다른 형제들보다 공부나 여러 방면에서 좀 더 특출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농악 연주 기술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할아버지가 땅 3000평을 기부해 지어졌다. 농악을 특성화해 전주대사습놀이까지 나가는 작지만 유명한 학교였다. 물론 지금은 학생이 없어 폐교됐지만 할아버지의 공적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농악 보유자의 손녀답게 수소고를 비롯해 수장고와 꽹과리도 잘 쳤다. 늘 앞에 서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지금도 꽹과리 장구 등 농악에 필요한 것들을 연출할 수 있다.
이런 적극적인 성향은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모든 행사에 열심이었다. 여름 성경학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어린이 찬양부르기 대회에도 나갔다. 특히 성경 암송을 잘했다. 오죽하면 학교 소풍 때 장기자랑 시간에 요한복음을 암송했을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온 가족이 등불을 들고 새벽송을 부르며 마을 이곳저곳을 다녔다. 불이 켜져 있는 집 앞에서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힘차게 불렀다. 불이 꺼져 있는 집 앞에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잠시 이 가정이 예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나는 어느새 말씀과 찬양에 친숙해졌다. 굳이 애쓰지 않고도 하나님을 자연스레 믿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오랜 시간을 통해 내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하나님을 믿어왔음에도 그분을 잊는 건 순간이라는 것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간 나는 20년 가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다. 중요한 건 핍박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신앙을 버린 게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내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 안됐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만날 때는 정말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왔다. 고난 가운데 피어난 믿음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강인한 믿음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7∼8)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현숙 (2) 3대째 믿음의 가정… 장기자랑으로 요한복음 암송
입력 2015-04-30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