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고나라론’ 인터넷 급속 확산… 중고 판다고 속여 챙긴 돈으로 도박→돌려막기→잠적

입력 2015-04-28 02:55

지난 12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사흘간 잠도 안 자고 ‘중고나라론’으로 10억원을 땡겼다(벌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을 쓴 A씨는 중고제품 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 포장지를 뜯지 않은 아이패드와 카메라 등을 중고로 팔겠다며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2813명이 사겠다면서 돈을 입금해 모두 9억5778만원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이 사기극을 벌이며 구매자들에게 계좌번호 문자메시지만 1만4000번이나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수법을 ‘대출’이란 뜻의 영어 ‘론(loan)’을 붙여 ‘중고나라론’이라고 표현했다.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듯 ‘급전’ 마련에 좋은 방법이란 뜻이다. 이 글의 내용은 사실일까. A씨가 실제 10억원을 챙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B씨는 지난달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사기를 당했다. 원하던 가방이 싼값에 매물로 나와 판매자 계좌로 돈을 보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물건을 받지 못했다. 뒤늦게 알아보니 판매자는 이 제품을 사겠다는 여러 구매자들에게 대금을 받아 ‘돌려 막기’를 하고 있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그는 처음 구매 의사를 밝힌 C씨가 송금한 돈을 써버리고는 C씨에게 제품을 보내지 않은 채 다른 구매자를 기다렸다. 다음 구매자 D씨가 나타나자 돈을 받아 C씨에게 환불해줬다. 이런 식으로 한 제품을 놓고 여러 구매자가 송금하는 돈을 돌려 막는 과정에 B씨도 걸려든 것이었다. B씨는 “계속 문자·통화를 시도하며 판매자를 물고 늘어진 끝에 조금씩 여러 차례에 나눠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신종 사기수법 ‘중고나라론’이 인터넷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절판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중고 사이트에 올려놓은 뒤 여러 명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등 다양한 변종도 생겨나는 중이다. 중고나라론 사기행각에 뛰어든 이들 중에는 구매자들에게 가로챈 돈을 불법 온라인 도박에 ‘베팅’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박으로 돈을 불리면 구매자에게 환불을 해줘 문제 삼지 못하게 하고, 돈을 잃으면 잠적해 버린다. 중고품 거래 사이트가 도박 판돈을 마련하는 공간으로 악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서로 수법을 공유하며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할 것에 대비해 일종의 매뉴얼을 만들기도 했다. ‘피해자가 고소하면 물건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 보내지 못했다고 할 것’ ‘이를 위해 반드시 자기가 갖고 있는 물건을 중고나라에 올릴 것’ 등이다. 이들은 이렇게 하면 사기죄 성립을 위한 고의성 입증이 어려워 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몇 건의 거래를 했는지 등을 보면 쉽게 사기의 고의성을 판단할 수 있다”며 “추후 환불을 통해 무마하더라도 반복될 경우 사기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