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일 新밀월시대에 한국은 관객 노릇만 할 텐가

입력 2015-04-28 02:04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이 시작됐다. 격식은 실무 방문이지만 공항 영접과 백악관 공식 만찬, 최고 수준의 백악관 의전 같은 것을 보면 거의 국빈 방문급이다.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도 갖는다. 존 케리 국무장관과의 보스턴 자택 만찬은 친밀감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사다. 외교상 의전 하나하나는 다 의도가 배어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미·일 방위지침 개정안이 발표되고, 큰 틀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관련한 합의가 있을 예정이다. 가히 미·일 신(新)밀월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미 관계는 전후 최상이라는 게 양국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 일본이 이를 가장 부러워했고 미·일 관계 격상을 위해 안달했었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을 둘러싼 한국의 외교 전략은 실패했다.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을 내세우면서 미국은 일본을 선택했다. 실패 원인은 미국을 축으로 한 한·미·일 3국 관계에서 한국 외교가 과거를 주장하는 동안 일본 외교는 미래를 주창하는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

아베는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일본이 미국과 함께 뭘 할 것인지,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비전을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사 집착은 우리의 외교 전략과 유연성의 발목을 잡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을 엮으려는 데 마음이 바쁜 미국에 피로감만 줬다. 그 사이 일본은 무인지경의 페널티 지역을 치고 들어가는 축구 공격수와 같았다. 결국 백악관 아시아 담당 및 외교안보 고위 참모들 입에서 “일본은 아시아 정책의 중심” “미·일동맹은 아·태지역 동맹과 우방의 중심”이란 언급까지 나왔다.

과거사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참혹한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광복 이후 제대로 친일파 청산을 못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유연한 접근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외교팀은 보통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국익과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투트랙 전략이든 우회 전략이든 합리적이고 냉정한 계산을 했어야 했다. 그 계산서가 여론과 다르다면 설득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지금 대통령의 생각과 외교팀의 전략으로는 몇 년 전 한·미·일 관계의 일본 꼴이 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