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길고 긴 12일간의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우리와 정반대쪽에 위치한 만큼 심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멀 수밖에 없는 중남미 대륙 방문은 대통령 임기 중 한 차례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듯 쉽지 않은 순방길이었고, 경제 성과 역시 나름대로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박 대통령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울 듯하다.
박 대통령에게 이번 순방 일정은 열흘 넘는 불면과 고뇌의 시간이었다.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 탓에 대통령 해외 순방 도중 국정 최고책임을 맡은 국무총리가 중도하차했다. 지난해 6월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 속 상황과 비슷한 기시감(旣視感)마저 느껴진다.
이번 중남미 순방에서의 일이다. 박 대통령을 수행하던 한 청와대 관계자는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중남미 국가들과의 정상회담 합의사항은 미래를 위한 국가 간 협력이었다. 또 큰 경제적 성과로 이어졌지만, 국내 이슈에 파묻히는 바람에 빛을 잃었다”고 말했다. 경제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한 기업인도 “이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글로벌 이슈를 충분히 논하고 리드할 정도로 높아졌는데 사회 전체가 국내의 한 이슈에만 휘말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사실 이번 파문의 무게는 남다르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박 대통령의 국정 동력 견인차를 위한 회심의 선택이었던 이완구 총리 카드는 어이없게도 두 달 만에 실패로 결론지어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친정(親政)체제 강화는 물론 안정적인 국정을 위해 야심 차게 꺼내들었던 선택지가 오히려 현 정부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내내 이어져온 총리발(發) 파동은 역대 어느 정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듯하다. 새 정부 출범 2년 반 동안 무려 5명의 총리가 중도하차하거나 청문회 시작도 전에 낙마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커다란 어젠다를 설정하면 총리가 이를 진두지휘하는 것이 국정의 기본인데, 그 총리 또는 후보자 5명이 모두 불명예스럽게 하차했다. 그동안 나라가 어떤 식으로든 굴러간 것이 오히려 용할 정도다.
27일 아침 귀국한 박 대통령은 곧 이 총리 사의를 수용할 예정이다. 남은 것은 형식상 절차인 사표 수리밖에 없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최근의 파문은 총리의 사퇴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박 대통령의 정치개혁, 사회개혁 천명은 더욱 절절하게 와 닿는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위기 타개책으로 정면 돌파를 택했다. 과거로부터 이어온 부적절한 관행을 과감하게 혁파하고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정치, 사회 전반에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전제가 하나 있다. 검찰이 주체가 됐든 특검이든 이번 의혹에 대한 한 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 철저한 수사와 실체 규명이 선행돼야 한다.
또 한 가지. 비리와 인습의 고리를 끊기 위해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은 자발적인 개혁 의지다. 이번 파문은 급변하는 사회구조와 행동양식을 쫓아가지 못하고 유독 구태에 갇혀 지냈던 정치권의 오랜 인식에서 비롯됐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적폐를 해소하는 개혁에 나서겠다고 스스로 천명한 박 대통령은 그 길을 가는 데 좌고우면해선 안 된다. 박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개혁밖에 없다. 박근혜정부의 시간은 반환점을 돌고 있다. 길은 멀지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개혁 의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뉴스룸에서-남혁상] 박 대통령의 길
입력 2015-04-27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