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한국경제] 日 자동차·조선업체 ‘닻’ 韓 석유화학·철강 ‘덫’… 가파른 엔저, 산업계 직격

입력 2015-04-24 02:54

원·엔 환율이 23일 오전 중 100엔당 900원선을 위협하자 국내 산업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의 성장 둔화, 유가 급락 등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수출 전선이 엔저 현상으로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세계시장에서 일본 업체들과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자동차 업종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엔저를 등에 업고 안정적인 성장은 물론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미래 경쟁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로 국내 자동차업계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장의 손해도 문제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입을 타격도 걱정해야 할 처지라는 의미다.

엔저에 힘입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잇따라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도요타는 2014년 4월∼2015년 3월 매출이 27조엔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특히 영업이익 증가분인 2000억엔 중 87.5%에 해당하는 1750억엔이 도요타의 자체 기준 환율 조정에 따른 환차익으로 발생했다.

조선업계도 일본 업체들이 엔저를 바탕으로 가격경쟁력을 크게 높여나갈 것으로 내다봤다. 기술력을 갖춘 일본 조선업계는 합병·공동출자 등의 구조조정을 통해 몸집을 키운 뒤 엔저를 기반으로 국내 업체들과의 가격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다. 일본 조선업계는 지난 1월 한국과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엔저로 가격경쟁력을 갖춘 일본 조선업계가 시장에서 강한 입김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외국 업체와의 품질 격차가 크지 않은 석유화학과 철강 품목의 충격도 예상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연평균 900원을 유지할 경우 올해 석유화학 수출이 작년 대비 13.8%, 철강 수출은 11.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석유화학·철강 분야는 환율 변동 같은 외부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특히 두 품목 모두 세계시장에서의 공급 과잉 문제에 직면해 있고, 중국·일본과의 수출 경쟁도 치열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유통·항공업계는 국내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줄고,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은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전자업종은 삼성·LG전자가 주요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과의 격차를 상당히 벌린 덕분에 다소 여유 있는 모습이다. 일본 전자 업체들은 대체로 해외생산 비중이 높아 엔저의 영향을 덜 받는 데다 일본이 강점을 가진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게임기 등 IT 시장의 성장이 정체돼 엔저만으로 성과를 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대일 교역량이 크지 않고, 달러로 주로 거래하는 정유 분야도 엔저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는 모습이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