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서망침례교회] 유배자의 땅 다도해 복음 기준점 되다

입력 2015-04-25 00:30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새진도교회(왼쪽)와 팽목성결교회.
송장가 문여임 김양금 집사(왼쪽부터). 한때 텅 빈 교회를 지켜낸 이들이다. 팽목항에 선 김승환 전도사가 교회 쪽을 가리키고 있다(오른쪽).
서망침례교회. 대한민국 지리좌표 통합기준점 표석이 교회 앞에 있다.
교회 마당에 서니 팽목항이 눈 아래다. 진도관제센터(VTS)는 더 가까웠다. 교회 뒷길을 따라 해안으로 걷다 보니 진도 남도석성이 나왔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 그 통한의 땅. 그 땅 언덕에 붉은 벽돌 예배당이 304명이 목숨을 잃은 맹골수도를 향해 기도하듯 서 있다. 그들은 이유도 모르고 죽었다.

교회 뒤 남도석성(南桃石城). 고려 원종 때 배중손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와 성읍민이 끝까지 굴욕을 거부하며 싸웠다. 성읍민이 몰살됐고, 1만여명이 몽골로 끌려가 노예가 됐다. 그들은 왜 죽는지 알았다.

그 교회 마당 바로 앞엔 의미 있는 화강암 표석이 서 있다. 지리좌표 통합기준점 표석이다. 우리나라 경도, 위도, 표고 등의 기준점이다. 이 지점을 기준으로 국가기본측량, 지적측량, 공공측량은 물론 내비게이션, 스마트폰의 내 위치 확인 같은 국민생활 편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통한의 땅엔 1980대 말에야 겨우 복음이 전파됐다.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다. 바닷가 마을은 잡신에 의지해 살았다. 언제 바람이 불지, 언제 너울이 일지 알 수 없었다. 성황당에 달려가 고기잡이 나간 서방님의 안전을 비는 아낙들이었다. 길도 없었고, 부칠 땅도 없었다. 고기를 잡아도 내다 팔 동네가 너무 멀었다. 광주리에 도미 장어 송어 우럭 등을 담아 이고 산길, 바닷길 돌고 돌아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어 자식을 키웠다. 그러니 하늘과 바다의 조화를 무서워했다.



통한의 땅 ‘팽목’…1980년대 복음 들어와

서망침례교회.

붉은 벽돌로 지은 전형적인 시골 예배당. 그 시작은 1988년이다. 수도침례신학교 신학생 윤배근(서울 쌍문동 꿈이있는교회) 목사가 맹골도 낙도선교에 나섰다가 십자가가 없는 땅이 안타까워 본격 개척한 곳이다. 지금의 교회 아래 슬레이트 지붕집이 첫 예배당이다. 윤 목사는 이곳에서 10년간 목회했다.

그 무렵 무속 분위기 속에서도 교회 출석을 했던 이들은 김양금(78) 송장가(75) 문여임(74) 집사다. 마을 사람들은 70∼80호 남짓한 마을에 최신식 교회 건물이 들어선다고 하니 날을 세워 막진 않았다. 차 진입도 어려운 꽉 막힌 어촌에 변화의 물결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절에 다니고 있었어요. 한데 교회 다니는 아줌마가 나를 전도했죠. 교인들이 새끼줄로 묶인 벽돌을 날라 예배당을 지었어요. 여자들은 세숫대야로 자갈과 모래를 이고 와 부었죠. 그때 우리 아들(설성일·52·선장)이 윤 전도사와 친구처럼 지내며 교회 건축을 했어요.”

김양금 집사의 기억이다.

이 벽촌에 번듯한 교회 헌당은 기적과 같았다. 92년 무렵 윤 전도사는 교회 건축을 강행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작한 것이다. 벽돌 몇 장 쌓고 돈이 생길 때까지 또 쉬는 공사가 이어졌다. 난망이었다.

그해 5월 13일 수원중앙침례교회 권용택(70·전 수원 백성병원 사무국장) 장로 등 전도위원회 일행은 낙도 조도침례교회 후원을 위해 팽목항까지 밤새 달려왔다. 아침은 서망교회에서 먹었다.

이듬해 2월 말 권 장로 일행은 조도 옆 대마도 의료 선교에 나섰다가 비바람으로 발이 묶여 서망교회를 또 들르게 됐다. 교회 건축에 따른 시골 목회자의 분투를 본 이들은 가진 돈 탈탈 털어 지붕 올리라고 35만원을 헌금했다. 윤 목사는 “중고등부 아이들 둘과 교회 건축을 위한 100일 작정기도를 했는데도 빚 독촉이 빗발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권 장로는 서울에 올라와 약수(藥水) 장사를 해서 서망교회 건축을 돕겠다고 기도했다. 한데 권 장로의 헌신을 알게 된 김장환 현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가 “그 먼길까지 선교를 위해 고생하신다”며 서망교회 건축비 750만원을 내놨다. 같은 교회 고명호 장로는 거울을 설치해줬고, 신순자 권사는 십자가 설치 비용을 헌금했다.

당시 윤 전도사는 권용택 집사에게 “다윗이 춤춘다는 말씀을 알겠습니다”라며 눈물과 기쁨이 뒤섞인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93년 7월 16일 그렇게 서망교회 헌당예배가 있었다.



울지 못한 유가족 아버지, 교회서 울다

22여년이 흐른 지난해 4월 16일. 이 교회 김승환(58) 전도사는 기도 중 불길한 헬리콥터 비행 소리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그 시간 이후 교회와 마을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구도 웃지 않았으며, 누구도 떠들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하나님’을 연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울부짖는 소리, 사이렌 소리, 헬리콥터 소리, 질주하는 경비정 소리…교회 주변은 임시 텐트가 쳐졌고 사람들로 엉켰다. 해안가마다 경찰이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했다.

“교회는 유가족 거처가 있는 데서 약간 떨어져 있거든요. 교회 앞바다에서 기도하는 유가족이 많았어요. 우리는 그들이 바다에라도 뛰어들까봐 늘 조마조마했지요. 어느 날 한 남자가 마을 구멍가게에서 술을 마셔 잔뜩 취해 울어요. 김종훈(57) 장로님과 제가 교회로 모셨어요. 한나절 이상 그 자식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고 기도했어요.”

그 아버지는 쌍둥이 아들 하나를 잃었다. 그 아버지는 울지 못했다고 했다. 아내 때문에 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가족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술에 의지해 울고 또 울었다. 누구도 울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을 뒷산에는 소리 없이 사라진 유가족을 찾느라 헬기가 뜨는 일도 가끔 있었다.

김 전도사는 울부짖는 심령을 위로했고, 박현숙(55) 사모는 자원봉사를 했다. 한동안 예배당은 자원봉사자 등 세월호 사고와 관련한 외지 크리스천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1년이 흘러 모두 떠나고 다시 10여명의 연로한 교인만 남았다. 교회는 지금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있다(롬 12:15).



한때 비었던 교회, 8년 전 다시 시작

‘팽목항’은 여객터미널이 있는 항구이고, 서망항은 어선들이 머무는 항이다. 이 둘을 합쳐 진도항이라 칭한다. 마을 사람들에겐 서망항이 생활의 근거다. 팽목항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섬사람들의 역과 같다.

이 마을서 나고 자란 김양금 집사는 연지곤지 찍고 이곳에서 혼인식을 했다. 그리고 조랑말 다섯 마리가 이끄는 신행길을 따라 이웃 지산면으로 시집을 갔다. 가마에 탄 신부는 그 아름다운 진도석성 앞을 지났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배웅했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과 작별하고 자식이 대처로 나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예수와 혼인하게 됐다.

송장가 집사는 관청도에서 큰 섬 진도로 시집왔다. 큰 섬이라고 와봤더니 친정 동네보다 못한 가난한 동네였다. 지게길 외에 길도 없었다. 그는 남편이 잡아올린 도미 등을 광주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자식들은 임회면사무소가 있는 십일시까지 20리(8㎞)를 매일 걸어서 등교했다. 부부는 등불을 밝혀 마중을 나가야 했다. 60, 70년대까지도 이런 오지가 없었다. 송 집사 역시 86년 교회가 들어오고서 비로소 영적으로 눈을 떴다.

문여임 집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 대리 출신이다. 문 집사 밑에 집이 김 전 대통령 집으로 그 집은 술 등을 파는 점방을 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처에 나가 공부할 무렵의 기억이다. 그는 이곳까지 시집와 보리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키웠다. 문 집사에게도 ‘번듯한 예배당’은 설레게 하는 문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목자의 양육이 미치지 못해 들쑥날쑥했다. 8년 전 김 목사 부부가 부임하기 전까지 교회는 2년간 비어 있었다. 지금은 외지에서 들어온 장로도 있지만 그땐 부녀들만 남아 있었다. 교역자들은 살림이 되지 않으니 예배당과 사택에 쓰다 만 짐만 남기고 떠나기 바빴다. 어렵게 세워진 예배당은 비가 새고 거미줄이 쳐졌다. 제민남 집사가 간신히 교회를 지켜가고 있었다. 그 제 집사는 지금 70대가 되어 외지에서 투병 중이다.

그때 봉산교회(옛 충남 조치원읍), 시편교회(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등을 섬기던 김 전도사가 기도 끝에 이곳을 방문, 부임을 결정했다. 사모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였다.

“저와 딸(다정·25·농협 근무)은 예배당과 사택 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어요. 남편 뜻이라면 못갈 곳이 없어 마다않고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내려왔는데 살림도 예배도 못할 형편이었어요. 몇 달을 치우고 또 치웠죠.”

부부는 흩어진 양들을 모아 ‘신앙의 기준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시는 ‘어린 양’을 버리는 일이 없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유배지의 땅 진도. 나라는 늘 이 변방을 버렸다. 그러나 백성은 나라를 지켰다. 그렇지만 예수의 탄생과 부활은 이렇게 버려지고 소외된 땅에서 시작된다. 지금 남도석성은 복원 중이고, 팽목항은 진도항으로 대규모로 개발 중이다. 이에 힘입어 서망교회는 다도해에 복음을 전하는 기준점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거미줄 쳐진 예배당이었다. 하나님 뜻은 아무도 모른다.

선원·은퇴자 선교 비전 품은 김승환 전도사
‘창조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부산 출신. 청년시절 여의도순복음교회 9대교구 청년회 총무 등을 맡아 불같이 뜨거운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문학적 감수성으로 방황도 적잖았다. “8년 전 혼자서 서망교회를 와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역지로 정했다”며 “교역자가 없는 예배당 앞에 서서 부끄럽지 않을 종이 누가 있겠냐”고 말했다. 그는 진도항 개발에 따른 선원 선교, 진도석성 앞 한옥단지 개발에 따른 은퇴자 선교 등에 비전을 얻고 있다. 한때 떠나고 싶은 갈등도 적지 않았으나 사례비와 자녀들 학자금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채워주셨다고 했다. “너희의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 앞에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저는 끝까지 이곳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지킬 겁니다.”
진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