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시절 B교수님의 강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넋을 잃고 빠져들게 하는 특유의 아우라를 강의실 가득 마구 뿜어냈다. 신학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끝없는 자부심이 들게 했다. 마구잡이로 책을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추동력도 대단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넘쳤다. 학식이 뛰어난 것도 용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었지만 행동거지에 권위가 넘쳐흘렀다.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자신이 왜소해졌다. 그림자도 밟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로 경외심이 생겼고, 어눌한 말투임에도 어떤 말씀이든지 꼼짝없이 순종하고 싶은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의 우리는 왜 이런 아우라와 카리스마를 가진 스승들을 만나기 어려워진 것일까.
권용선이 쓴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을 읽다가 아우라(aura)의 의미를 알고 난 뒤 이런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본래 미학적인 개념인 아우라는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한다. 예술작품이 지니는 고유하고 개성적인 본질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해 어떤 인물이나 사물 혹은 사건이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뿜어내는 일회적 분위기 혹은 기운이 아우라다. 중요한 것은 같은 사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놓이는 시공간이 바뀌면 아우라는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야민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이치를 설명한다. 옛날 어떤 왕이 전쟁터에서 쫓기다가 작은 오두막집에 숨어들게 되었는데 그 집 노파가 산딸기 오믈렛을 대접했다. 그 순간 게 눈 감추듯이 너무 맛있게 먹었기에 왕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도무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여 궁중 요리사에게 예전에 그 노파가 만들었던 오믈렛과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내라고 명령하면서 실패할 경우 죽이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요리사는 오믈렛을 어떻게 만들어야 그런 맛이 나는지 훤히 알고 있었지만 그때와 똑같은 오믈렛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제아무리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낸다고 할지라도 ‘왕이 드셨던 오믈렛의 재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까지는 자신이 마련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러기에 오믈렛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오믈렛을 감칠맛이 나도록 만든 그때의 독특한 분위기는 되살릴 수 없다는 변명이었다.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곱씹으면서, 학창 시절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열강을 하셨던 은사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문제는 그런 아우라를 생성해내는 학자도 목사도 점점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말이 옳다면 그런 분들의 강연 자체보다 그 강연이 이루어진 독특한 시공간의 분위기가 재현 불가능하기에 그와 똑같은 아우라를 재차 체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고 최고의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과 다르셨다(막 1:22). 귀신조차 굴복했기에 ‘권위 있는 새 교훈’(막 1:27)이라며 세상이 경탄했다. 예수님이야말로 거룩한 아우라를 마구 뿜어내셨고 신비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셨던 분이 아닌가. 내가 괴롭고 슬픈 것은 나의 설교와 가르침이 언제나 서기관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시온의 소리-김흥규] 그때 그 아우라는 어디에?
입력 2015-04-24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