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22일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주변국을 침략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다는 역사를 직시하고 사죄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아베 총리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재확인해줬다.
이번 연설은 오는 29일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과 8월쯤 발표할 전후 70주년 담화(일명 아베 담화)의 ‘풍향계’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아베 총리가 이날 연설에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에 명기됐던 ‘식민지 지배와 침략’ 등의 표현 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미 의회 연설과 아베 담화에도 이들 표현이 담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먼저 종전 10년 만인 1955년 반둥회의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일본의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밀어줬다”며 각국에 감사를 표명했다. 이어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10원칙 가운데 ‘침략, 무력행사에 의해 타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은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한다’는 두 원칙을 언급하며 일본은 이 원칙을 과거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떤 때라도 지켜나가는 국가일 것을 맹세했다고 소개했다. ‘반성’이란 한 단어만 언급했을 뿐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았다.
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일본의 공헌을 소개하고, 5년 동안 두 대륙에서 35만여명의 인재를 육성하는 데 지원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연설 내용 대부분을 일본의 과거 및 미래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에 할애한 반면 침략으로 고통받은 아시아인에게 사과하겠다는 뜻은 담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10년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반둥회의 연설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등을 언급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그해 8월 전후 60주년 담화에도 이들 표현을 그대로 담았다.
우리 정부는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반둥회의에 참석한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아베 총리 연설문에 사죄의 표현이 없어 깊이 유감스럽다”며 “미 의회 연설과 70주년 담화에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반영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역사 뒤집기 시도는 최근 미·일 밀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주도권을 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일본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과 미·일 방위지침 개정을 놓고 일본에 우호적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아베 총리의 과거사 인식에 대해 누그러진 발언을 하는 데 이어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은 26일부터 미국을 국빈방문하는 아베 총리를 보스턴 자택으로 초청, 만찬을 함께하기로 했다. 케리 장관이 자신의 고향 보스턴으로 아베 총리를 초청한 것은 개인적 친밀도를 높여 양국 간 민감한 현안을 풀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아베의 마이웨이] 사죄 빠진 말로만 반성… 美 의회 연설 ‘예고편’
입력 2015-04-23 02:28